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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준비에 여념 없는 요즘, 그날 피로는 그날에 풀어야 할 것 같아 사우나에 자주 들린다. 하루는 목욕탕에서 부자간 나누는 대화가 무심결 들어왔다. "아빠, 뜨거운데 왜 시원하다해!"
시원하단 말만 듣고서 발을 담갔다 뜨거운 맛(?)만 경험한 꼬마가 억울했는지 원성을 높였다. 어릴 때 비슷한 경험이 내게도 있다. 아버지는 온탕에 들어가면 세상 다 가진 표정으로 말했다. "시원~하다."

말이 전부는 아니다. 말은 2차원이라 숨겨진 의미를 잘 살펴야 한다. 우리에게는 '뉘앙스'라는 외래어가 더 익숙한 '함의', 말에는 함의가 있다. 축제를 준비하면서 나는 글 서두에 '주민'의 함의를 새삼스레 정의하련다.

'주민이 먼저다' 구정 방향이 간단명료 잘 담긴 울산 남구의 슬로건. 그런데 따져보면 나도 삼산동 주민이고 대통령님도 어딘가의 주민일 것이다. 시장님도 주민이고, 공무원들도 모두 주민이라 한다면 다 주민이다. 누구 하나 주민 아닌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주민 중에서 먼저여야 하는 주민은 누구란 말인가? 그 누구는 바로 '진짜주민'이다.
장황해질 걸 알면서 왜 나는 구태여 이런 시시한 말을 꺼냈나. 너도나도 주민이라 자처하며 생떼를 쓰며 이런저런 요구를 해오는 가짜 주민들이 참 많기 때문이다.

정책용어에 등장하는 주민이라 함은 나도 대통령님도 시장님도 공무원도 아니다. 안타깝지만 예술가도 여기선 주민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주민은 수요자 즉 진짜주민을 두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단의 주요사업 중 축제와 공연사업이 있다. 적잖은 예산이 쓰이다 보니 지역 예술종사자들로부터 하루에도 수십 통씩의 전화를 받는다. 직접 찾아오는 이들도 꽤 많다. 지역주민이라며, 때로는 높으신 분과의 인연을 운운하면서까지 결국 자신들을 세워줘야 한다며, 좋게 말하면 자기PR, 나쁘게 말하면 청탁들이다.

완성도 높고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 건지 예술가들은 늘 여기에 힘써야 한다. 그러기에도 모자랄 시간인데, 축제가 시작되기 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또 맡겨놓았다는 듯 예산을 쉽게 받아 가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육된 예술가라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항간에는 "지원금이 예술을 망친다!"라는 속설은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경쟁력이 담보되지 않는 무분별 특혜성 지원금은 일부 예술가에게 사료나 다름없다. 야성을 잃고 길들어져서 관객들의 마음을 사냥하려기보다 지원금이라는 달콤한 사료만 기다린다. 만약 나오지 않으면 떼를 쓰기 시작한다. 정치 인맥을 들먹이면서까지 말이다.

정치에 문화를 이용하는 것은 들어봤어도 문화에 정치를 이용하는 것은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역할을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예술가는 공급자이고 주민은 수요자이다. 그리고 나는 매개자이다. 이곳 출신이 아닌 내가 하는 말이라 몇몇 분들은 고깝겠지만, 모름지기 매개자의 역할은 수요자들을 위해 양질의 공급자를 찾아서 이어주는 것이다.

문화재단 사업 기치는 주민들의 문화 향유기회를 제공하는 것일 터. 진짜주민들로 하여금 문화를 통해 주민 삶의 질이 올라가게 하는 것일 터. 재단은 거기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흔히들 말하는 '수요자 중심'이라 부르는 그것 말이다.

예전에 어머니는 장 볼 시간이 없었든지 아니면 귀찮았든지 암튼 일주일 동안 콩나물 반찬만 식탁에 주구장창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세상 잃은 표정으로 말했다. "반찬이 이게 뭐냐."
주민들로부터 이런 핀잔을 안 듣고자 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맛도 좋고 건강에 좋다면야 전국을 뒤져서라도 산해진미 구첩반상을 내놓고 싶은 것이 매개자의 욕심이다. 다만 내가 구하는 그것들이 지역산이면 좋겠다. 그러기엔 인적 인프라가 부족한 것이 냉정한 지역 현실이다.

지역 예술가들이 무대 몇 번 선다고 지역 문화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어쩌면 개간(開墾)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재단의 역할이 크겠지만 말이다.

울산이 어떤 도시인가. 2차 산업시대 대한민국을 일으킨 저력이 있는 도시 아니던가.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안다고 4차 아니 5차 산업시대라고 어찌 못 할쏘냐. 스스로 문화 불모지라는 타성에 벗어나 전국과 해외에서 우리 울산발 문화예술이 역수출된다면, 글쎄, 상상만 해도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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