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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피로를 몰고 이동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을 즈음이다. 인솔자가 일정에 없던 발 마사지를 받는다고 안내한다. 언젠가 소통이 불편한 나라에서 무턱대고 발을 맡겼다가 몸살이 난 경험이 있는 나로선 별로 내키지 않는 일정이다. 예정된 코스를 둘러보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나 시간 투자에서 기대치를 높여도 좋다는 말에 조용하던 차 안 분위기가 단숨에 생기로 가득하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도심 속 어느 한 후미진 골목이다. 어두컴컴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아가씨들이 방을 안내한다. 하나같이 젊고 예쁜 얼굴이다. 한 아가씨가 싱긋 눈인사하는데, 허리는 내 팔뚝만 하고 손목은 세 다리처럼 가늘다. 저 체구에 무슨 힘이 있을까 싶을 만큼 왜소하기 짝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손놀림이 시원스럽지 못한 데다 슬슬 내 눈치까지 살핀다. 한눈에 봐도 신출내기다. 표나게 손이 늦은 아가씨에게서 연민의 감정이 느껴져서일까, 오래전, 내가 처음으로 손님 머리에 손을 대기 시작했을 때의 맵싸한 기억이 고개를 든다. 

갓 결혼한 나는 무슨 용기가 났는지 미용학원에 발을 들였다. 평생 직업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새내기 주부 역할마저 내팽개치고 기술 배우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삼전사기 끝에 자격증을 따고 실전에 투입되었다. 신체 어느 부위라고 다를까마는 남의 머리 만지는 일은 생각보다 부담스럽고 어려웠다. 하세월 가발에 쏟은 연습량이 만만치 않았건만 손님 얼굴이 하나같이 호랑이로 보였다.

한번 잘 못 건드려 놓으면 마마보다 무섭다는 아줌마 부대는 애초에 쳐다볼 엄두도 못 냈다. 그렇다고 꼬마 손님도 만만히 대할 처지가 아니었다.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은 아이일수록 단시간에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했기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이었다. 

이래저래 피하고 나면 그나마 상대하기 쉬운 머리는 뜨내기 성인 남자였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남자 손님이 여자 손님보다 입이 무겁고 실수를 해도 따지는 일이 드물다. 때마침 인상이 선한 남자가 들어왔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앞뒤 가리지 않고 덥석 머리를 잡았다가 입술이 타고 온몸에 피가 바작바작 졸아드는 느낌을 받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는 손님의 날카로운 눈매를 의식할수록 떨리는 손을 감출 수 없었다. 초보 티를 내지 않으려고 연신 머리카락에 물을 뿌리고 빗질을 해도 긴장감만 더해갔다. 그도 그럴 것이 밤톨 같은 마네킹만 만지다 하필 잡은 머리가 희한하게 꼭뒤가 틀어져 균형을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기술이 부족하다 보면 더러 삭이기 어려운 모욕감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때가 있다. 그 무렵 중년 부인의 머리를 잘 못 건드렸다가 분무기로 물세례를 받은 동료가 있었다. 나라고 그런 수모를 당하지 말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왕초보인 내가 감당하기 버거운 두상이라 원장에게 사인을 몇 차례 보내도 일부러 본 척 만 척 외면했다. 

부딪쳐야 느는 게 기술이다. 섶 지고 불로 들어가는 심정으로 가위를 들었다가 일명 '호섭이' 머리로 변신해 버렸다. 사는 동안 사람이 사람 앞에서 그렇게 미안해지는 순간이 몇 번이나 있을까. 거울에 비친 자신의 헤어스타일에 황당해하는 손님을 보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번 잘 못 잘린 머리카락은 쏟아진 물이나 마찬가지다. 요리조리 거울이 뚫어지라 살피던 그가 자포자기했는지 먼저 말을 걸었다. "기술을 익히는 중인가 봅니다, 다음엔 더 예쁘게 잘라 주세요" 

마사지사의 서툰 손놀림이야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지만 머리카락은 다 자랄 때까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신경 쓰인다. 자칫 갑질로 이어질 수 있는 입장인데도 얼굴에는 감정의 그늘이 없었다. 덕분에 '노력하면 해낼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설만큼 일을 배우는 내내 힘이 되었다. 이후 그는 나의 오랜 단골이 되었지만, 그렇게 특이한 두상은 두 번 다시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결점도 있었겠지만 천성이 순한 사람이라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손님이다.

묵은 거지보다 햇거지가 더 견디기 어렵다고 한다. 한 시간 가까이 아무런 연장하나 없이 다른 사람의 뭉친 근육들을 풀어내는 초보 마사지사를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든다. 처음 겪는 일에 대한 고충이 느껴져서일까. 가녀린 손으로 양말을 벗기고 양동이에 발을 담글 때까지만 해도 내키지 않았던 마음이 새삼 느슨해진다.

돌고 도는 세상이다. 믿고 맡긴 머리를 망쳐도 싫은 내색하지 않았던 손님에게 진 빚을 갚기라도 하듯, 능숙하지 못한 마사지사의 손놀림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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