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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뿔 주걱

김덕남

이국의 주방에서 물소가 울고 있다
이맛전 맞부비던 종족을 생각하나
뿔 하나 세우기 위해 지평선을 내닫던

뜨거운 태양 아래 새끼를 키워내듯
간절하면 나아가고 그리우면 눈을 감는
바람길 열어간 전설
뿔과 뿔로 전했지

종일토록 매달린 채 적막을 지켜내다
저릿하게 젖이 돌던 초원을 떠올리나
서둘러 가슴을 연다
따끈한 밥 올린다

△김덕남: 국제신문신춘문예당선 시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현대시조 100인선 '봄 탓이로다' 등 제9회 시조시학 젊은 시인상 수상.
 

이서원 시인
이서원 시인

해외여행이 보편화 된 요즈음 여행을 다녀온 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작은 기념품으로 선물 하나쯤은 사오는데 그중 동남아 여행객들은 '물소뿔 주걱'이 많다. 환경의 문제가 요즘처럼 크게 대두된 적이 있었나 싶으리만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이 시대에 물소들의 안위가 자못 궁금해진다.


조선후기 성리학에 있어서 심각하게 거론된 문제가 바로 인간과 동물의 성질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이었다. 후일, 논쟁을 넘어서 학파 또는 당파로까지 발전하기도 한 일명 호락논쟁(湖洛論爭)은 당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민족의 시련과 사회 문화의 무질서 속에서 땅에 떨어진 도덕의식과 인간의 주체성을 세우는 데 기여한 바도 컸다. 이 땅에 수많은 종(種)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의 소유인지도 모를 이 지구라는 별 위에서 동물과 인간이 서로 상존하며 함께 더불어 나아가야 할 일임은 자명하지만 그 시대는 또 다른 이념과 대립하며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던가 보다.


시로 다시 돌아가 보자. 머나먼 고향을 떠나온 물소는 이 땅 어느 가정집 주방까지 흘러 들어왔다. 그것도 주걱이라는 전혀 낯선 존재로 말이다. 주위를 돌아보아도 플라스틱 수저, 도자기 그릇 등 전혀 처음 보는 것들뿐이니 소통은 어렵겠다. 그러니 어찌 자기가 뛰어놀던 초원에서 '이맛전을 맞부비'던 종족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뿔 하나 세우기 위해 지평선을 내'달리던 자유의 광활했던 초지(草地)가 푸르게 떠올려지고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새끼를 키워내듯'이 지금 우리네 부엌에서 '따끈한 밥'을 올리는 주걱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은 다시 '적막을 지켜내'며 '젖이 돌던' 엄마의 모성 본능으로 귀소한다. 


'간절하면 나아가고 그리우면 눈을 감'던 왕년의 전설 같은 호시절이 누군들 없겠는가. 그러나 쇄하고 멸하는 것인 순명이고 진리인 것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자각의 끝에 '종일토록 매달린' 옛 뿔은 자신의 권위와 동시에 무기였다. 적으로부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존재의 수단이기도 했다, 허나, 이미 옛 '뿔'은 사라졌고 '주걱'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보시의 길에 들어섰으니 그 뿔 참 미덥기 그지없다. 오늘 물소의 뿔은 밥 속에서도 뜨겁게 자신을 지키며 인간에게 숨결을 부여하는 생명의 하얀 고봉밥을 퍼 올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냥 참 고맙다.
 이서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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