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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중에 가끔씩 '나에게 만약 투명 망토가 있다면'이란 글감으로 상상글 쓰기를 하게 할 때가 있다. 그럴 경우 많은 아이들이 '나를 괴롭히는 나쁜 친구를 혼내주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나쁜 친구는 도둑이나 깡패와 같은 '나쁜 사람'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아무튼 아이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상황을 사적 응징의 기회로 삼는 편인데, 이런 면에서 아이들의 상상력은 어른보다 오히려 빈약한 듯하다. 어른들의 경우는 단순한 복수가 아닌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상황은 사실 자기 욕망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인 셈이어서 이를 소재로 한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대표적인 것이 전래동화 '도깨비감투'이다. 머리에 쓰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감투를 우연히 얻게 된 어떤 이가 감투를 이용해 도둑질을 하다가 감투에 구멍이 나서 빨간 헝겊으로 깁는데, 빨간 점이 나타날 때마다 물건이 없어지는 걸 알게 된 사람들에 의해 정체가 밝혀지고 혼이 난다는 이야기다.

비슷한 이야기가 플라톤의 『국가』에 나온다. 리디아에 사는 기게스란 목동이 땅이 꺼진 틈으로 들어갔다가 금반지를 낀 거인의 시체를 보게 된다. 목동은 반지를 빼서 자기 손가락에 끼는데 돌리는 방향에 따라 자기가 사람 눈에 띄기도, 띄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반지를 이용해 왕비와 사통을 하고 결국 왕을 살해한 뒤 자신이 왕이 된다는 이야기다. 두 이야기는 모두 자신이 감추어질 때 드러나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풍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래동화의 도둑은 사람들에게 들켜 혼꾸멍이 남으로써 악에 대한 응징이 이루어진 반면, '기게스의 반지'는 악인이 오히려 영화를 누리게 되는 현실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그리고 플라톤은 반지를 낀 상황에서 남의 것에 손을 대지 않는 그런 올바른 마음을 철석같이 유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감추어질 때, 나의 정체를 모를 때 도덕적이고 바르게 행동하기는 사실 쉽지 않다. 우선 집 밖과 집안에서만도 우리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진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앉고, 눕고, 서고,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게 된다.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거나, 마음껏 방귀를 뀌거나, 껌처럼 소파에 붙어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거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시선의 자유에서 더 나아가 아예 내가 누군지 모른다면, 나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모든 금기와 제약에서 해방된다면 인간은 밤거리를 누비는 하이드가 아니라 낮거리도 활보하는 슈퍼하이드, 울트라슈퍼하이드가 되지 않을까.

'기게스의 반지'는 이후 서양의 문학과 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요즘 자신을 가려주는 기게스의 반지라면 인터넷상의 익명성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닉네임이라는 반지를 끼고 컴퓨터에 접속한다. 그리고 익명의 뒤에 숨어 악플을 달고 조롱과 분탕질을 한다. 인터넷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댓글 부대를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거나 교묘히 뉴스를 편집하여 진실을 왜곡하는 가짜뉴스를 퍼뜨린다. 리디아의 기게스는 혼자였지만, 넷상의 기게스는 멀티아이디를 동원해 호기심을 숙주 삼아 바이러스처럼 퍼져간다. 진위와 옥석의 구별이 점점 어려워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컴퓨터는 도깨비감투의 꿰맨 자국처럼, 접속 기록이 있어서 완벽한 투명망토가 되어주진 못한다. 소위 누리꾼들의 신상털기를 통해 정체가 드러날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대단한 악플러나 가짜뉴스의 진원지가 사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이거나 가끔씩은 아주 유명인사이기도 해서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어쨌든 완벽한 기게스의 반지는 없는 것이 아닐까. 하긴 완벽하다면 감지조차 안 된다는 것이니 우리가 그 존재 여부를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더하여 생각해보면, 익명성이 반드시 나쁜 쪽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영화이지만 가면과 망토로 자신을 숨기고 남을 돕는 쾌걸 조로나, 배트맨 같은 영웅으로 나타나기 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익명의 기부천사들도 있다. 그래서 '기게스의 반지'는 기게스의 '반지'가 아닌, '기게스'의 반지라는 생각도 든다. 반지가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 플라톤도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기게스의 반지를 가졌건 갖지 않았건 간에 '올바름'을 행해야 하며 그것이 결국 좋은 것임을 무려 600여 페이지의 글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 두께의 책을 읽는 것만큼 쉽지 않은 일이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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