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유형문화재 지정 비석들
울산의 유형문화재 지정 비석들
  • 강현주
  • 승인 2019.06.20 23:00
  • 기사입력 2019.06.20 20:22
  • 댓글 0
  • 온라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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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제12호 경숙옹주 태실 및 비.
유형문화재 제12호 경숙옹주 태실 및 비.

 

울산시에는 제10호 효자 송도선생 정려비, 제12호 경숙옹주 태실 및 비, 제13호 반고서원 유허비 등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의미 있는 비석들이 있다.

#제10호 효자 송도선생 정려비 1기
송도(宋滔)는 연안 송씨로, 조선 초기 울산에 살았던 효자였다. 선생은 울산지역 최초의 생원(生員)으로 병든 부모를 10여 년 동안이나 정성껏 간호했다. 모친이 병이 깊어 물고기회를 구하고자 했으나, 가난해 마련할 수가 없어 얼음판을 두드리며 울었다. 그러자 붕어가 뛰어나왔다고 한다. 1년 사이에 부모가 잇달아 돌아가시자 몸소 흙과 돌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 유교식 예법에 따라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시고 새벽마다 배알하고, 때에 맞추어 제사지냈다. 당시까지 불교식 장례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송도의 효행은 매우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428년(세종 10) 효자로 정려되고 표창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돼 있다.


효문동(孝門洞)이라는 마을 이름도 그러한 사실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연안 송씨 족보에는 정려비가 본래 효문동에 있었으나, 1737년(영조 13)에 울산도호부 서쪽 연못 인근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정려비 앞면은 '효자성균생원 송도지려(孝子成均生員宋滔之閭)'라 적었으며, 뒷면에는 송도의 효행을 기록했다. 정려비 왼쪽의 깨어진 비석은 '강희임진(康熙壬辰) 팔월(八月)'이란 구절로 보아, 1712년(숙종 38)에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중구 우정동에 있던 비석과 비각을 2006년 이곳 (중구 북정동 350-1)으로 옮겨왔다.

 

#제12호 경숙옹주 태실 및 비 1기
'태실'(胎室)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시는 작은 돌방이다. 예로부터 왕실에서는 왕실의 번영과 왕실자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전국에 이름난 산을 찾아 태실을 만들고 태를 묻었다고 한다. 이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하며, 태비(胎碑)는 태실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실 앞에 세운 비석이다.

태실과 태비는 울산지역(울주군 범서면 사연리 산112)에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태비 앞면에 '王女合歡阿只氏胎室(왕녀합환아기씨태실)'이라고 기록돼 있으며, 뒷면에는 '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성화이십일년팔월초육일입)'이라고 기록돼 있다. 기록으로 보아 1485년(성종 16)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고, 또한 태실의 주인공이 경숙옹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초 태실이 도굴됐으나, 다행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태실 유물인 태항아리 2점과 태지(胎誌) 1점을 찾아 소장하고 있다.

 

#제13호 반고서원 유허비 3기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석으로, 이 비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포은 선생은 고려 우왕 1년(1375)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에 있으면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원배명' 정책에 반대하다가 언양에서 1년 넘게 귀양살이를 했다. 그동안 반구대에 올라 '중양절감회'라는 시를 짓는 등 많은 자취를 남겼다.


숙종 38년(1712) 언양 지역 유생들이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세 분을 추앙해  반고(槃皐)서원을 세우고 제사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흥선 대원군의 명으로 서원은 문을 닫게 됐다. 그 후 지역 유림들이 포은대영모비(1885), 포은대실록비(1890), 반고서원유허비실기(1901) 3기의 비석을 차례로 세웠으며, 1965년 현 위치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00-1외)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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