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끔 오만방자(敖慢放恣)한 인간과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런 부류의 자들은 대체로 눈빛이나 용모보다는 태도와 말에서 교만이 흘러넘친다. 무엇보다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동작이 느리고 굼뜬 데다 말투는 비유나 은유를 즐긴다. 특히 이런 자는 상대가 약점을 보이거나 빈틈이 있다 싶으면 곧바로 자세를 바꾼다. 바로 아베 이야기다. 최근들어 아베 신조가 내뱉는 말들이 변화하고 있다. 에둘러 표현하던 한국과의 불편한 이야기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튀어나온다. 가장 최근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말장난의 상대로 이용했다. 

일본 민영 TV아사히 뉴스에 출연한 아베는 "문재인 대통령은 대북 영향력이 없다"며 한반도 평화를 향한 남북미 간의 공동노력을 질시하고, 문 대통령의 역할을 노골적으로 폄하했다. 한발 더 나아가 아베는 "국가 간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일본도 뭐든 보여줘야 한다"며 적대적 관계의 상대방을 칭하는 '무코가와(저쪽 편, 상대편)'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우리 정부와 문 대통령을 폄하했다. 이런 자가 총리로 있는 나라가 이웃이니 참 불편하다.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일본은 툭하면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며 언제든 경제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면서 비자 제한 등 후속 조치도 준비됐다며 은근히 더 많은 카드가 있다고 슬쩍 협박까지 하고 있다. 

이쯤 되자 우리 시민·사회 단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는 지난 주말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무역보복을 규탄하고, 일본 제품의 판매 중지를 선언하는 합동 기자회견을 열렀다. 이들은 "대한민국 중소상인·자영업단체들은 과거사에 대한 일고의 반성 없이 무역보복을 획책하는 일본을 규탄한다"면서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전 업종에 걸쳐 일본 제품 판매 중지 운동에 돌입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미 일부 소매점에서는 일본 담배와 맥주에 대해 전량 반품처리하고 판매중지에 돌입했다"고 덧붙였다.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일본 저항운동에 돌입한 상태다. 이들은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함께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해 규탄하는 시민·사회단체의 입장을 발표하고 즉시 행동으로 일본에 항의하겠다고 밝혔다. 시민단체 서울겨레하나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관련 시민단체인 정의기억연대 등 수많은 반일단체들이 지난주말 반일 행동에 팔을 걷고 일전불사를 외치고 있다. 

문제는 이들 단체보다 일반 국민들과 자영업자의 움직임이다. 온라인상에선 일본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매운동 분위기가 일파만파로 번지는 모습니다. SNS에선 "평소 자주 먹었던 일본 맥주에서 유럽 맥주로 바꿔야겠다", "올여름 계획했던 일본 여행 비행기 표를 취소했다"는 등의 반응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일본 경제 제재에 대한 정부의 보복 조치를 요청한다'는 청원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안타깝지만 이같은 국민적 저항 운동에 대해 우리 정치권은 여전히 남 탓만 하는 구태로 일관하고 있다. 불편한 이웃의 불쾌한 발언들을 되받아치고 국제사회에 당당하게 일본의 부당한 행위를 부각해야 할 시점에 우리 정치는 여전히 서로 삿대질이 고작이다. 국익이 심각하게 침탈한 상황에서도 대한민국 야당은 정부 헐뜯기에 혈안이고 그동안 뭐 했냐는 식으로 우리끼리 책임 전가에 열을 올리는 작태를 보이고 있다. 딱하고 한심하지만 이 정도가 대한민국 정치 수준이다.      

일본하면 울산도 예사롭지 않은 과거를 가진 도시다. 지난 2010년으로 기억한다. 울산시가 일본 구마모토(熊本)시와 우호협력도시 협정을 체결했다. 우호협력의 종잇장에 서명을 하고 광범위한 교류를 다짐했다. 행정은 물론 의회와 민간 부문에서까지 이미 활발한 교류가 있으니 우호협력도시 협정은 당연하다는 뉴스도 나왔다. 그 후로 다시 세월이 흘렀고 엄청난 교류가 있었다. 구마모토는 울산과 인연이 깊은 도시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에서 퇴각하면서 많은 울산 사람을 끌고 가 지금까지 그곳에 울산마찌(蔚山町)라는 마을이 남아있을 정도다. 하지만 왜인들은 울산과 마주할 때마다 우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지난 일들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 침묵은 일본의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다. 그들은 한 번도 울산시민들에게 오래전 울산 장정들을 끌고 가 노예보다 못하게 부려먹은 일과 열다섯 갓 넘은 처자부터 유부녀까지 마구잡이로 끌고 가 능욕을 벌인 일을 정면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울산 장정들과 처자들을 끌고 가 만든 성이 일인들이 그토록 칭송하는 구마모토성이다. 

구마모토성을 축조한 자는 조일전쟁 때 조선인 학살과 문화유산 파괴자로 악명이 높은 가토 기요마사다. 울산에 왜성을 지어 수비에 치중한 가토는 조일전쟁 7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처절한 전투로 알려진 울산성 전투를 맞이했다. 애마를 죽여 피를 마시고 인육을 먹고 버틸 수밖에 없었던 가토는 도망치다시피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영지에 성을 쌓았다. 바로 구마모토성이다. 가토는 구마모토에 대규모 축성사업을 시작했다. 울산성 전투의 악몽을 거울삼아 성안에 우물을 무려 120개나 파고 건물 벽체와 다다미에 고구마 줄기를 말려 만약을 대비했다. 일본 근대 내전에서 치열한 공방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세이난전쟁 때 사이고는 1만 4,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50여 일간 구마모토성을 공격했으나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갔다. 바로 이 전쟁 직후부터 구마모토성은 난공불락 철옹성의 상징이 됐다. 그 난공불락의 성을 밑바닥부터 쌓아 올린 이들이 울산의 장정들이었다.

구마모토 이야기는 일본의 과거사 부정과 아베의 역사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일본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는 순간, 교과서나 독도, 심지어 임나일본부까지 떠벌려 왔던 모든 과거가 치욕으로 돌아온다고 인식하는 자가 아베다. 어쩌다 저따위 함량 미달의 지도자가 일본의 총리로 승승장구하는지는 아이러니지만 아베의 일본은 엄연한 현실이다. 바로 그 아베는 가능한 위안부의 산증인들이 임종의 순간을 맞을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면 된다는 치졸한 믿음 하나를 틀어쥐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에는 돈을 쥐어주고 슬쩍, 위안부 소녀상 문제도 흘렸다. 그러면서 일본은 직접적인 원죄가 없고 관여하지도 않았지만 우는 아이 떡 쥐여주는 마음으로 너그럽게 대국의 도량을 다 했다는 선전에 열을 올렸다. 

덮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인간사에서 덮어주는 행위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용서뿐이다. 일본에 대한 세계인들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우호적이다.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의 태도, 일본의 자연과 일본인이 만든 제품에 대해 세계인들은 대체로 우호적이고 친밀감을 느낀다. 과거 일본이 잔혹한 전쟁범죄를 주도했고 학살과 만행을 일삼았다는 인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한 우호적인 여론이 일본을 교만하게 만들었다. 오직 자신들을 괴롭히는 것은 생생한 증거가 널려 있는 이웃 국가들뿐이다. 그 가운데서도 대한민국은 언제나 자신들의 지나간 오욕의 역사를 생생한 민낯으로 만나야 하는 국가다. 그렇다 보니 일본에게 대한민국은 눈엣가시다. 가능한 과거사를 덮고 미래만 보자는 지도자가 나오면 반갑다. 그런 지도자를 만날 때마다 아베는 허리를 굽신거렸다.

문제는 과거를 제대로 보고 미래로 가자는 지금이다. 과거를 덮을 수 없다고 하니 아베의 본성이 이빨을 드러낸다. 아베의 행위는 그의 외조부 시대, 일장기가 태평양 곳곳에 펄럭이던 화려한 과거로의 자맥질과 다름 아니다. 어린 아베가 청년 아베에서 지도자로 변모할 때마다 그 자맥질은 선을 넘었다. 피로 얼룩진 가문의 유전인자가 매일 새로운 만행으로 세포분열을 거듭하는 것처럼 아베는 매일 새로운 만행을 꿈꾸고 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악수하고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 응징하는 정면 대응이다. 또다시 화해와 치유 같은 어정쩡한 문장으로 아베와 악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래야 제2, 제3의 아베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