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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면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중략>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통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枯淡하고 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했던 우리나라의 시인(1912~1995). 본명은 기행(夔行)이다. 평북 청주 출생,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방언을 즐겨 쓴 시들을 발표했다.
 

한채영 시인
한영채 시인

밀국수를 먹던 계절이 왔다. 마당가 늙은 감나무 아래 평상을 펴고 여름 그늘을 즐기던 시절, 식구 많은 집 어머니는 일찍 저녁 준비를 하셨다. 팔이 저리고 어깨가 아프도록 밀가루 반죽을 하고, 굵고 긴 홍두깨로 얇게 밀어 가늘고 고운 칼국수를 빚곤 하셨다. 백철 솥에 멸치 국물을 만든 뒤 감자와 양파, 호박을 넣고 그리고 송송 파를 넣어 자주 너렁국을 끓였다. 아궁이에 콩깍지로 불을 지피면 탁탁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 이마에 땀이 비오듯 했다. 논둑에서 웃자란 쑥을 베와 모깃불로 지폈다. 연기를 마시며 평상에 누워 별자리를 찾던 날 사춘기를 지나던 오빠의 반항기가 펄펄 끓는 너렁국 같았다. 대문 앞 우물은 담장 넘는 소리에 깊은 파문이 일었고 어머니 가슴에도 불꽃이 일었다. 봄을 지나 청춘을 건너는 시간, 백철 솥에 철철 넘치는 너렁국이 어머니를 달래고 있었다.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식구가 많은 집에선 자주 국수를 말아 먹었다. 농가엔 밀을 갈아 시골 방앗간에서 가는 밀국수를 빼, 한 해 양식으로 깊숙이 도장 살강에 저장을 했다. 국수는 비가 오거나 출출할 때 새참으로 먹으면 제 맛이다. 혹은 반가운 손님이 와도 쉽게 상에 오른다. 가끔 어머니 손맛이 그리울 때, 운전 중 차를 돌려 혼자 문수산 아래 할매 집으로 달려갈 때도 있다. 백석 시인은 겨울에 살얼음이 살짝 언 국수를 좋아하나 보다. 얼음을 띄운 한 여름 밤 열무잔치국수는 아 이 맛이야, 먹어 본 사람은 안다. 장마가 지나가는 칠월 어느 날 시인은 쓸쓸한 추억의 잔치국수를 골목 국수집에서 먹는다.  한영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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