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를 읽는 금요일] 시시비비
[에세이를 읽는 금요일] 시시비비
  • 울산신문
  • 2019.07.18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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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자 수필가

파란 호수 위로 물비늘이 반짝거린다. 달아오른 팔월의 열기가 아직은 후끈하지만, 산빛을 품은 저수지의 물결이 갈바람에 물이랑을 짓는다. 잠겨 있던 '남생이 바위'가 형체를 보일 만큼 가물어도, 나그네의 가슴을 풍덩실 적셔주는 오어지다.


운제산 계곡을 막아 만들어진 오어지에는 재미난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시대 원효대사와 혜공선사가 이곳에서 수행을 정진할 때였다. 법력으로 계천에서 물고기 두 마리를 잡아먹고 생환토록 뼈를 방면했는데, 한 마리는 물속으로 사라지고, 다른 한 마리는 물 위로 힘차게 떠올랐다. 이를 본 두 스님은 눈앞에 보이는 물고기가 서로 자기 고기라고 우겼다.


시냇물 소리는 부처의 소리요, 산 색깔 또한 부처님의 청정심이라 하지 않았던가. 물고기 한 마리를 두고 덕 높은 고승들이 이런 시시비비를 벌였다니 사람이면 누구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가 느껴진다. 서로 자기 고기라고 우겼다 해 절 이름도 오어사(吾魚寺)라 지었다. 장난삼아 티격태격했을 개구쟁이 같은 고승들의 익살스러움에 빠지다 보니 수 해전, 작은 밭뙈기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했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조용하던 시골집에 도회지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저수지가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다 집을 지으려니 우리 밭이 진입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진 시골에 젊은 사람이 이웃으로 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였다. 손수레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을 트럭이 다닐 수 있도록 밭을 내어 주었다.


집을 다 지을 때까지만 임시방편으로 밭을 빌려 쓰고, 공사가 끝나면 원상복구 해 주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집이 완성되면 출입로는 저수지 쪽으로 낸다고 했으니, 얼마간의 편의를 봐 주면 이웃 간에 정도 생기고 젊은 사람한테 힘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정성 들인 밭도 망가지는 건 순간이었다. 재래종 부추가 있던 자리는 흔적조차 사라지고 콩밭도 절반은 뭉개졌다. 레미콘 차가 들락거리면서 굽었던 밭 자락은 곧아지고, 보드랍던 흙은 시멘트 바닥처럼 딱딱해졌다.
승용차가 교행하고도 남을 만큼 옆구리가 잘린 밭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가슴에 생채기가 났다. 무도 심고 배추도 심어 원래의 밭으로 회복시키려는 마음이 앞섰다. 그래도 밭을 내어준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 하루빨리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계절이 바뀌었다. 탁 트였던 밭 앞에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고급스러운 한옥이 우뚝 섰다. 부모님의 감정이 얽히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분주하게 들락거리던 트럭이 사라지고 낯선 집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못쓰게 된 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젊은이를 찾아간 아버지는 뭉개진 밭을 일구어 주길 거듭 일렀다. 아버지의 당부에도 차일피일하던 젊은이가 하루는 일꾼을 불러 땅을 뒤엎고 밭둑을 쌓았다. 그의 행동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던 부모님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원래 밭 폭은 턱없이 줄어들었고 좁았던 길은 두 배나 넓어져 시원하게 트였다. 당초의 밭과 길의 경계선을 두고 아버지의 주장과 크게 엇갈렸다. 애초에 저수지 쪽으로 대문을 낸다는 것도 지키지 않았다.
부모님의 호출로 형제들이 모였다. 시골 늙은이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어머니가 금목걸이를 내어놓았다. 원래 밭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뜻대로 측량 기사를 불러 밭 너비를 쟀다. 측량한 길은 손수레가 아니라 자전거 한 대도 지나가지 못할 만큼 앞집 담장과 맞붙었다. 아버지는 측량사가 시키는 대로 밭 경계선에다 여봐란듯이 말뚝을 꽂았다.


노인네의 본때에 뜨끔해진 젊은이였다. 집만 덩그러니 지었지, 사방 고립되어 꼼짝할 수 없게 되자 아버지를 찾아와 재산상의 손실을 보상하며 자신의 잘못을 용서 빌었다. 진즉에 신사적으로 부탁을 했으면 못 들어 줄 일도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두 집 사이에 신경전도 없었을 터인데 어물쩍 넘어가려던 그의 처사가 괘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언제까지 이웃 간에 날을 세우고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뒤늦게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도와줄 것을 청해 왔으니 외면하지 못할 부모님이었다. 조금 손해를 보고 감정이 상했어도 고랑에 흙 덮듯이 마음 밭을 덮어야 했다. 불편했던 감정이 사과 한 마디에 풀어지는 것도 시골인심이다. 마음이 약해진 아버지는 승용차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의 길을 터주는 것으로 이웃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혼자 살 수 없는 세상 아닌가. 서로 한발씩 양보하고 마음을 트자, 내 땅 네 땅이라고 얼굴 붉혔던 지난날이 무색할 만큼 인정 있게 지낸다.
두 고승이 서로 자기 고기라고 우겼다는 오어지에 얽힌 우화를 듣다 보니, 작은 밭뙈기를 잃고 울뚝불뚝하던 부모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내 것 주고 뺨 맞는 거 아니냐.'며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던 어머니는 추어탕 한 그릇을 끓여도 혼자 못 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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