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얼마 전 퇴근길, 병영농협에서 지인 한 분을 만났다. 볼이 들어가 보일 정도로 살이 빠졌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멈칫하곤 몸이 가벼워 보인다고 했더니 여간 좋아하지 않으셨다.

사실 그분은 평소 몸에 예민한 편이라 말을 돌렸던 것이다. 뜻밖에 좋아하던 군것질을 아예 끊었다며 즐겁게 털어놓았다. 순간 모 일간지에 실렸던, 고문에 피골이 상접한 도산 얼굴이 스쳤지만 서로의 안부만을 챙기며 병영사거리에 닿을 즈음이었다.


웬 중년 남녀가 불쑥 가로막더니 다짜고짜 "반일 감정 조장하는 문×× 탄핵하자"며 "문×× 하야 1,000만서명운동"에 동참해달란다. 무슨 미×짓이냐며 고함을 질렀더니, 눈을 세모꼴로 치뜨더니 뒤의 아주머니에게로 다가갔다. 너무 황망하여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내내, 서울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아베 수상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며 "친일만이 살길이다. 일본 파이팅!"을 대놓고 외치던 토착 왜구들의 그 소름끼치던 모습과 겹쳐져 도대체 노기가 그치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걸었던 그 길은 정확히 100년 전, 4월 4일 오전 11시 조금 넘은 무렵 일신학교(병영초등)에 모인 병영애국청년들의 "대한독립만세!" 외침을 물꼬로 삽시간 흥분과 감격의 물결로 뒤덮였고, 일본군 수비대, 왜경, 주재소 순사들의 무차별 총칼 조준 가격에, 앞장서 태극수기 흔들던 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룡 의사가 그 자리서 순국했고, 맨몸의 만세 대열도 피범벅이 되고 말았던, 기미년 병영 4·4·5만세, 그 비폭력 평화투쟁의 핏빛 정신이 서린 곳이다. 그런 성소에서 백주대낮에 그토록 불경한 친일파무리들이 설치다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더구나 아베의 경제침략에 거국적으로 합심하여, "NONO재팬!"을 부르짖는 이 판국에.

며칠 전 모 방송 앵커브리핑 시간, 최린, 아니 창씨 개명한 이름 가야마 린(佳山麟)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으나 항일은 짧았고, 친일은 길었다. 그런 그가 해방 후, 반민특위의 심판을 받는 재판정에서 최소한의 염치가 남았던지, "내 사지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찢어 달라. 그리하여 민족의 본보기로 삼아 달라"고 했단다. 그때 함께 재판 받던 이광수(가야마 미쓰로, 香山光郞)-1937년경부터 청년들에게 일제의 학도병으로 나갈 것을 독려함-가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한 것"이라 주장하자, 최린(가야마 린)의 일갈은, "그 입 닥쳐!"란 외마디였다.

사실 1919년의 이광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 발행까지 맡았던 애국청년이었다. 그런 그의 뒤엔 스승 도산 안창호가 있었다. 그러나 자금난에 빠져 허덕일 때 그는, 도산의 극력 만류에도 1921년 4월, 애인이자 대한민국 최초 산부인과 여의사인 허영숙을 따라 귀국한다. 그 이듬해인 1922년 개벽 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했다. 그 궁극적 주장이 '독립 포기와 일제지배 안에서의 자치'였다. 이랬던 그가 1937년경부터 친일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그것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폭탄 의거에 연루된 도산이 체포·압송되어 형을 살다 1935년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뼈만 남자 가출옥한 얼마 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도산과 이광수 등 181명이 함께 체포됐다가 1938년 3월 결국 피골상접한 도산 선생이 경성제대 병원에서 사망하고 만다. 이후 조선의 해방이 불가능하다고 단언, '조선민족'은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때 일로 전영택·현제명·홍난파 등 18명이나 변절했었다.

그리고 이광수(가야마 미쓰로)는 한 번도 자신의 친일을 반성하지 않았고 오로지 변명으로만 일관했다. 그런데 얼마 전 병영사거리와 서울 한복판에서의 친일파들에게선, 같은 친일파 이광수에게 듣던 변명마저도 없다. 도저히 이 땅을 사는 같은 한국 사람으로는 안 믿어진다.

타산지석, 반면교사는 '타인의 흠을 거울삼는다'는 말이다. 지난 2012년 9월 국내 한 보도에 의하면, 일본 정부가 영유권 분쟁 지역인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국유화한 데서 촉발된 반일시위에선, 일 기업 파나소닉 전자부품 공장, 도요타자동차 칭다오 판매 1호점 등에 중국 시위대가 난입해 건물과 전시장 등에 방화했고, 후난성 창사 일본계 백화점 헤이와도 또한 습격, 약탈까지 하고, 일본 관광객을 마구 위협하여 폭도화 하는 양상까지 갔단다. 일본 정부가 저지른 행위로 일본인 개인과 사기업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

명심보감에는, "나를 귀하게 여김으로써 남을 천하게 여기지 말고, 자신의 용맹만 믿고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했다. 이는 적을 가볍게 여기는 것만큼 싸움에서 패하는 지름길은 없고, 남을 경멸하는 것만큼 남이 자기를 경멸하게 하는 것도 없다는 말이다.

1937년, 150여 일간의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될 때의 도산을 곁에서 본 독립운동가 장이욱은 한 글에서, "거의 저승 시민을 보는 듯하였다"고 했다. 그런 도산이 평생 부르짖고 실천한, '무실역행, 충의용감(務實 力行 忠義 勇敢)'즉 "언제나 참되기를 노력하고, 그것을 스스로 힘써 실천하고, 옳은 일이면 어떤 것이든지 작정하면 손익을 떠나 끝까지 정성을 다하고, 신의를 지켜고, 무슨 일에나 용기 있고 굳게 나아가라"는 가르침이다.

지금 일본 정부와 아베가 우리를 침탈하고 있다. 그런데, 일각에서 'NONO재팬!' 한다면서 일본차에 '주유 거부'를 하고, 지자체장이 직접 나서서 'NONO재팬!' 하는 건 진실로 피골이 상접한 채 죽어가며 '대한의 독립'을 외치던 도산의 진정한 가르침과는 멀다. 그 가르침대로 한다면, 시민 자발의 'NONO재팬!'은 우리 모두 더욱더 강화 확산시키고, 방문하는 일인들 개개인에겐 더욱 친절하고 잘 보살펴야 한다. 그래야 진짜 극일(剋日)을 넘어 승일(勝日)한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