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그릇
  • 울산신문
  • 2019.08.15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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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연 수필가

쟁여둔 그릇들을 꺼냈다. 졸망졸망한 것들을 언제 다 사다 모았는지 부엌 바닥에 가득하다. 한때는 자주 부려먹던 것들이다. 추억까지 담긴 식기류들이지만 이제는 대부분 버려질 것 같다. 

그릇들의 컬러가 민무늬나 흰색이 대부분이다. 화려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주로 사들인 그릇들은 독특한 것들이 없다. 가끔은 호기심에 샀던 것들이 여러 종류의 그릇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 

이제 나는 살림에 젬병인가 보다. 주부들은 예쁜 그릇을 보면 감탄사를 연발하거나 그릇 사는 재미도 쏠쏠하다는데 그런 재미는 고사하고라도, 구경거리로도 별 흥미가 없으니 내가 주부이긴 하나 싶다. 어느 지인은 밖에서 사 온 음식이라도 예쁜 그릇에 담아내면 기분이 좋다고 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니 그럴 수 있겠다. 아니 한 맛 더 나는 것이 당연할 것 같다. 

막상 꺼낸 접시들에 담아낼 음식이 없다. 그릇에 어울릴만한 메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요리 책자를 펼쳐 들었다. 한 줄로 나열된 빈 접시 위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의 이름을 투영시켰다. 탕수육에서 고등어조림까지 입맛 돋을만한 다양한 반찬들을 줄을 세웠다. 홈이 있는 접시에는 봉골레 파스타를 담으면 좋겠다. 마늘 바지락 파스타를 만들어 주면 그만이겠다. 바지락 마늘 청양고추만 있으면 된다. 테두리가 넓고 큰 접시에는 두꺼운 해물파전 한 장이면 족하다. 저마다의 접시에 꿈같은 기억을 그려 넣으며 잊고 사는 나의 시간을 조명했다. 낯선 이름들이 아닌데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음식도 자주 만들어봐야 더 새롭고 맛있다. 오래전에 했다고 해서 지금도 되는 것이 아니다. 손맛이 괜히 생긴 말이겠는가. 손맛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거나 누군가에게 배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실패하고 도전해서 맛을 찾아야만 그 맛이 나듯,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손맛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주 만들어 먹었던 음식들도 시켜 먹게 된 지 오래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사 먹는 것이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가족에게 정성이 부족하다 싶어서 음식 위에 불편한 마음도 얹었다. 이제는 만들거나 사먹는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보다 함께 먹는 것에 더 의미를 두었다. 

바깥일도 핑계가 되어 집안일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만들어 먹는 것보다는 사 먹는 것이 더 빠르고 경제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집안일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있다. 최대한 능률적인 것에 에너지를 모으자는 생각이고 가족들도 그다지 불편해하지 않으니 나도 조금은 자유롭다.

아무리 예쁜 그릇이라도 담겨질 음식의 종류에 따라 그 용도가 다르다. 사람의 그릇도 음식의 그릇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 음식도 그릇에 따라 담기는 모양이 달라지듯 사람도 어떤 그릇인지에 따라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허나 가끔은 자신의 리셋도 필요하다.

음식이야 만들어진 그릇에 담으면 그만이지만 사람의 그릇은 그와 달라서 좋은 그릇,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힘들다. 누군가 나의 그릇을 채워주는 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이 걸쳐서 갈고 닦아야 스스로 빛나는 좋은 그릇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릇도 크기가 있다.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도 정해진다. 사람은 품이 그릇이다. 품이 넓어야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겠다. 언제쯤 내 품이 큰 그릇이 될까 갈수록 옹졸해지는 듯한 이 마음을 어떻게 할까. 그릇들을 다 버리고 나니 쓸 만한 그릇 몇 개 되지 않는다. 나의 좁은 품도 덩달아 버려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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