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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치술령산 정상의 망부석 앞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다. 아득한 신라 때의 일이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는 왕제 미해를 기지로 무사히 구출해 신라로 보낸 다음 그곳에서 붙잡혀 갖은 고문과 회유를 받았으나, 모두 물리치고 순국한 박제상의 아내 김씨부인이 딸과 함께 낭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지쳐 죽고 나서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

이 전설의 바위를 나는 50년 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새내기 PD시절이었다. 그때는 저 아래 만화리에 살던 박치간씨의 안내를 받고 스스로 올라왔던 길을 오늘은 마을청년의 지게에 올라 앉아 오르게 되었다. 숱한 기억이 치술령을 넘어 가는 구름처럼 피어난다. 말을 못하는 이 바위도 이제는 말을 할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은 일본이 무역보복으로 총성 없는 전쟁을 걸어오고 부터다. 한 여인의 아름다운 절개에 나는 매료되어 있었다.

망부석을 소재로 한 시 한편을 얻으려고 무던히 몸부림치다가 지난해에 와서 쓰게 되었는데 그 시가 지금은 가곡으로 불리고 있지만 망부석의 설화는 나의 문학에 자양분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 고장의 정신문화에 깔린 초석이 되고 나라의 기간이 되었다. 충신 박제상의 얼은 고헌 박상진의 넋으로 이어지고 정정한 소나무의 가지 끝에 어리는 외솔의 나라사랑 정신으로 피어났다. 아니, 지독히 극심한 고문을 가해도 굽히지 않는 박제상의 무쇠같은 기개에 놀란 일본 왕이 신하가 되어 줄 것을 다가와서 말하고 여생을 편안히 지내도록 하겠다고 말하자 얼굴을 꼿꼿이 세우고 "계림의 개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소!" 하면서 일왕을 노려보던 충신의 높은 절개가 국난을 당할 때마다 기어이 뭉쳐 위기를 뛰어 넘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켜온 우리가 아니었던가?


세월이 흘러 청태마저 씻겨 나간 채 백골로 앉은 바위라 할지라도 이제는 일본을 향하여 짧은 한마디의 감정을 말해주리라 믿고 찾아온 나에게 바위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환청으로라도 꼭 한마디를 듣고 가리라 하면서 멀리 일본을 바라보며 역사를 더듬어 본다.


일본 아시까가 막부와 조선이 국교를 트게 된 것은 1404년이었다. 아시까가 장군이 보낸 일본국왕사는 60여회였다. 서일본의 호족인 오오우찌이며 쓰시마의 소오등의 사신들이 울산 염포를 비롯한 부산포, 제포 이른바 3포에 대거 들어오게 되었다. 그 수가 연간 5,000명을 넘었기 때문에 조선은 이들의 접대에 부담이 커 골머리를 앓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꾸준히 맞으면서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각종 문물을 전하고 있었다. 일본도 혹해 조선통신사를 오게 하고 극진한 대접을 했다. 조선통신사를 위한 도로를 새로 만드는가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조선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웠던 양국 간의 선진우호를 허물어 버린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바로 풍신수길이 무모하게 저지른 임진왜란이었다. 일본은 은혜를 무력침공으로 앙갚음한 것이었다. 그 히데요시의 망령이 다시 살아났음인가? 아베총리는 무역보복으로 인류공영의 질서를 깨뜨리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 만들기에 정치력을 쏟아 붓고 있다. 무슨 전쟁이라도 전쟁을 좋아 할 사람이 수십억 인류 가운데 몇 사람이나 될까? 성경에도 칼을 가지려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써져있다.


총성 없는 무역전쟁도 전쟁일터인데 그 결과도 두고 볼 일이다. 그 결과를 일본은 여러 차례 경험한 바 있었다. 그 종말을 보고 경험한 일본이기에 일본 내에서도 아베총리가 지난 역사를 바로 읽어 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진주만을 습격한 다음은 패망을 맞았고, 임진왜란 역시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남쪽바다에 저승사자 이순신이 버티고 있고 믿었던 가등청정마저 울산의 의병들에게 대패했음을 알고 갑자기 쓰러지고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한 채 열흘을 넘기지 않아서 황천길로 들고 말았다. 그가 남긴 사세가는 전쟁을 일으킨 후회의 죗값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이슬처럼 떨어져서 이슬처럼 사라지는 이 몸이어라, 난파의 일들은 꿈속의 또 꿈…" 아베총리가 직시해야 할 과거 역사가 어찌 다를 수 있으랴. 멈출 수 없이 이어지는 한국과 일본과의 역사를 되뇌이며 다시 청년의 지게에 다시 오르려했다. 그때였다. 말을 하지 않는 망부석으로부터 새마을 회관에 걸린 확성기의 소리처럼 크고 또렷한 여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환청으로 들렸다.


일본이 진정 사죄하고 이웃국가로서 제 몫을 한다는 것은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고 없을 지아비를 이 곳 치술령으로 보내줄 정도로 진심어린 성의를 보이는 것이라요…. 그렇다. 일본의 진심어린 역사의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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