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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문화재자료 제5호 박상진 의사 생가.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5호 박상진 의사 생가.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된 박상진 의사 생가(북구 박상진길 23)는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의사가 살았던 곳이다.

#1910년대 최대 규모 독립군 단체
박상진 의사는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세가 되던 1902년부터는 의병장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판사로 있던 허위(許蔿)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904년 양정의숙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해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됐으나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연락 본부로 삼았고, 1915년 1월 안일암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다.


그 해 7월 '풍기광복단'의 인사와 합작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취임했다. 대한광복회는 충청도·전라도·경기도·황해도·평안도와 만주 각지에 조직을 가지는 1910년대 국내 최대의 독립군 단체로 성장했다. 박상진은 곳곳에 곡물상을 설립해 연락 거점으로 삼아, 일제 타도를 추진하는 행동 강령으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을 시달했다.


박상진은 1916년 만주에서 무기와 화약류를 들여오다가 잡혀 6월간의 징역형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친일부호 처단을 여러 차례 계획했다. 그러던 중 1917년 11월 채기중·유창순·임봉주·강순필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했고, 1918년에는 김한종·장두환·김경태·임봉주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게 했다. 이 때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됐다.

#조선 후기 양반집 ㅂ자형 구조
박상진은 1918년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오는 길에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고, 1921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이후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대지주였던 박상진 의사는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해 집안은 몰락했다. 박상진 생가는 남의 손에 넘어갔으나, 2002년 울산시가 매입해 2007년 복원 정비 사업을 완료했다. 사랑채, 안채 등 모두 6동의 건물로 이뤄진 기와집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ㅂ'자형 구조를 가진 조선 후기 양반 살림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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