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국 사태로 올해 경술국치일은 번잡스럽게 지나쳐 버렸다. 그래도 몇몇 정치인들의 퍼포먼스와 애국단체들의 집회는 있었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나버린 나라 잃은 날, 우리는 여전히 나라를 훔친 자들의 후손들과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당 의원들은 불편함을 직접 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지난 주말 독도 땅을 밟았다. 독도경비대를 찾아 대원들을 격려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일본의 경제도발을 이겨 내겠다"는 외침은 아무래도 머쓱해 보인다. 독도가 일본의 말장난에 오르내리는 것은 현실이지만 굳이 국치일에 독도를 찾는 이벤트가 필요한가는 의문이다. 너무나 명백한 자신의 몸뚱이를 하나쯤 꺼내 보이며 이건 분명 내 몸이니 함부로 넘보지 말라고 외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시비를 하는 쪽은 상대가 반응할수록 즐거운 법이다. 무관심과 무반응에 안달인 자들에게 독도에서 태극기 휘날리는 이벤트는 소란피우기 좋은 시빗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고노 일본 외무장관이 우리 정부를 향해 "역사를 바꿔 쓸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적 과오를 외면하고,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는 일본 정부의 관료가 피해당사국을 향해 지른 최악의 막말이다. 고노의 의식 밑바닥에 깔린 자신감의 근거는 한일청구권협정이다. 지난 1965년 한일 간 맺은 협정을 오늘의 한일관계의 출발점으로 보는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무라이의 후예들은 한 세기 넘게 유지되어온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의 역사를 지난 1965년 한일협정으로 바꾸려는 이른바 '역사 수정주의'를 기획하고 있다. 한국은 물론 주변국들의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역사 수정주의를 슬쩍 흘리는 것은 식민 지배와 전쟁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아베식 왜곡주의의 산물이다. 

여기서 바로 아베의 의도가 읽힌다.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배국가나 전쟁피해국들과 새로운 역사적 출발점을 만들어 과거가 아닌 오늘의 관점으로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를 지우겠다는 속셈이다. 

지난 8월 29일은 한민족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국권 강탈의 날이다. 우리는 이날을 경술국치일로 부르며 반면교사의 역사학습을 계속해 오고 있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난 그날은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이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무력으로 강탈하고 한일병합을 강제로 날조한 날이다. 수많은 북방 오랑캐들의 침공이나 질긴 왜구의 노략질에도 단 한 번 국권을 내주지 않았던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역사가 시작된 출발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경술년의 치욕적 사건으로 국권을 잃었다. 경술국치는 과거 역사의 한 장면을 넘어 근대사의 제국주의가 낳은 비극으로 자리했다. 자존을 위해 쇄국의 말뚝을 박고 그 말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굳이 일제의 만행 운운하며 책임 전가로 밤을 밝힐 일은 아니다. 국권을 빼앗기고 외교를 유린당한 치욕의 책임은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것이 첫째다. 누굴 탓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근대라는 이름으로 전함을 이끌고 아시아로 향한 제국들은 하나같이 약소국을 집어삼켰다. 러시아가 그랬고 미국이, 영국이 그랬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미개한 나라에 불과한 아시아 약소국들을 교화하고 자국의 영토로 삼는 일은 당시 열강들의 지상과제였고 그 목표를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했다.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하며 학살은 물론 대포로 공개 처형하는 만행도 아무렇지 않게 자행했다. 문화재 약탈과 식민지 백성의 노예화는 기본이었고, 이를 거스르는 어떤 행위도 무자비한 폭압으로 눌렀다. 미국이나 프랑스 등 지금 세계를 움직인다는 열강들은 도적 떼처럼 뻘건 눈빛으로 한 평이라도 더 남의 땅을 뺏기 위해 혈안이었고 때로는 야합으로 때로는 주먹질로 시정잡배들의 의기투합처럼 서로를 다독거리는 난장판이었다. 

문제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짓밟고 대동아공영을 외친 이중성이었다. 일본은 히틀러보다 앞서 민족의 서열화를 통치수단으로 이용했고 전체주의에 기초한 인간의 우열화를 지배의 방법론으로 변형시켰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누구보다 객관화한 미국의 정치평론가 그레고리 헨더슨의 지적처럼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는 '식민전체주의'였다. 미 군정청에서 7년간 한국 정치를 직간접 체험한 그는 일본의 식민 통치는 서구 열강이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 행한 식민통치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일제의 조선 식민화는 그야말로 물리적 억압을 넘어, 언어와 역사의 소멸은 물론, 창씨개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민족 말살 그 자체를 시도했다. 일본이 민족적으로 우월하기에 미개한 조선인을 자국민화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모든 만행이 정당하다는 논리였다. 

인류사를 통해 수많은 법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지만 부끄러움을 법으로 제어하진 못했다. 부끄러움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기본이다. 부끄러움은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드러냄이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후안무치다. 부끄러움을 모르면서 내일을 이야기하는 자의 뒷자리는 불편하다. 바로 그런 자들을 이웃에 뒀고 그 뻔뻔함과 매일 만나야 하는 불편이 이어지는 오늘이다.

경술국치 100년이 되던 지난 2010년 공영방송의 역사 프로그램에서 울산의 의사 고헌 박상진 장군의 일대기를 방송했다.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은 알아도 그의 대장 광복군 총사령관 박상진은 아무도 몰랐다. 방송이 나가자 울산 송정동의 고헌 생가는 뉴스의 초점이 됐다. 그리고 7년 뒤 지난 2017년 전쟁기념관은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투쟁에 헌신하고 순국한 박상진 장군을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울산이 낳은 근대 인물 가운데 박상진 장군은 단연 특출하다. 

법률공부를 하고 판사시험에 합격했던 장군이 왜놈의 법을 집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광복군에 뛰어든 것은 스승의 영향이 컸다. 그의 일생에서 스승 허위와 이토의 심장을 도려낸 안중근 의사는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한 멘토였다. 박상진 장군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당당함이다. 장군은 의병장이던 스승의 죽음 이후 만주를 떠돈 뒤 민족의 반역자들을 처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처단의 기회를 엿보던 장군은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민족반역자와 부역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처단을 통보했다. 이같은 기개는 일제의 폭압이 자행되는 암울했던 시기에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고 비열한 일제 앞잡이와 지도부에게 경종을 울리려는 외침이었다.

다시 경술국치일을 보내면서 장군을 떠올리는 것은 그의 고향 울산이 가진 항일정신의 면면한 역사성 때문이다. 울산은 일제강점기를 떠올리면 독립의 의지가 어느 곳보다 강했던 항일투쟁의 중심 도시였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까마득히 먼 시절, 울산은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임진년 조일전쟁 때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섬나라 도적 떼들을 가장 최일선에서 맞선 항전의 땅이었다. 

이를 기억하고 찾아낸 울산시는 최근 과거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 출발에 망부석의 박제상이 있어야 하고 조선의 외교관 이예 선생이 자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항일의 뿌리에 관문성과 기박산성, 도산성전투에서 산화한 이 땅의 민초들과 노예로 끌려가 참혹한 삶을 산 수많은 전쟁포로를 제자리에 서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 울산이 지난 한 세기 일본과 무슨 일을 했는지 되돌아보고 잘못된 역사를 새로 고치는 작업도 서둘러야 한다. 박상진 장군이 일제에 압송되는 날 죽어서 어찌 고개를 들 수 있겠냐(사하면목 死何面目)고 되물은 자조의 넋이 허망한 울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들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