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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매력적이다. 춤을 추기 시작하면 경직된 몸과 마음이 일순간에 허물어진다. 일상의 불편함도 잔잔한 물결처럼 흘러간다. 대책 없이 춤은 사람을 빠져들게 한다.

춤이 좋다. 그렇다고 춤꾼은 아니다. 잠깐 춤을 배우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나가는 호기심이라 여겨진다. 내심 그 길로 가지 않았음에 스스로 다행이다 싶다. 전문가의 길로 가기에는 내가 가진 끼가 모자랐다. 그저 흥이 나면 리듬에 맞춰 내 마음대로 춤을 추는 것으로 족하다. 전문가가 되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끔 춤을 출 때가 있다. 아주 짧거나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어머니 앞에서다. 혼자 독무대를 갖는다. 내가 춤을 추면 당신은 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환하게 웃는다. 춤을 추는 것은 주로 어머니 앞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로는 가족들 앞에서도 추기도 하지만 오롯이 구순이 다 된 어머니를 위해서다. 나름 리듬감이 있다고 여기나 나의 어설픈 몸짓이 오히려 당신을 더 즐겁게 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어머니는 무용수들이 추는 아름다운 전통춤을 보게 되면 이해하지 못하지 싶다.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것 같다. 축제나 행사의 오프닝으로 춤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관객의 입장에서 춤을 보면서도 잘 이해하거나 몰입하지 못한다. 그분들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그러나 춤은 관객도 흥이 나게 해야 좋은 춤이라고 생각한다. 무지한 나의 춤에 대한 지론이니 어쩌랴. 그것도 개인의 취향이지 않은가. 탓하지 말기를 소원한다.

어머니 앞에서 처음 춤을 추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몇 년 전 어머니가 집에 다니러 온 적이 있다. 가족들이 출근을 하고 나면 어머니는 하루 종일 혼자였다.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서는 태화강만 바라보고 있다. 오래 머물지도 않을 텐데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짠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 준비를 하려고 주방으로 걸어가면서 덩실덩실 엉덩이를 흔들었다. 나의 갑작스런 춤으로 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환한 당신의 웃음을 보면서 당신을 즐겁게 할 수 할 수 있는 것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짧은 순간의 돌발적인 춤이 어머니를 웃게 했다. 그것이 춤의 시작이다.

허나 어머니는 나보다 춤추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잘 춘다. 물론 노래 솜씨도 일품이다. 어릴 때는 연례행사로 봄이 되면 동네 아낙들이 봄놀이를 갔다. 물론 어린 나도 따라나섰다. 행상이나 농사일을 하지 않는 시간 외는 대부분 가까운 곳을 갈 때는 나도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마을에서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멀리로는 목포나 여수 오동도를 다녀왔고, 가까운 곳은 남해 금산 입구에서 마음껏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출발 때부터 놀이꾼들은 흥분되어 있었던 것 같다. 어른들의 소풍이다. 우중충한 일복을 벗어던진 아낙들은 집에서 성의껏 장만한 음식을 한 손에 들고서 장구쟁이를 따라나섰다. 장구를 치는 사람은 출발하면서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쉬지 않고 장구로 흥을 돋우었다. 그 흥에 아낙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지친 노동의 피로를 풀었다. 물론 나도 어른들 앞에서 춤을 추고 따랐다. 장구쟁이 옆에 바투 쫓아가며 팔을 흔드는 나를 보고 한마디씩 건넸다. '그 어미에 그 딸이라고' 어른들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지도 몰랐고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았던 것 같다. 한복이 땅에 끌릴까 봐 허리끈으로 치마를 끌어 올려 허리에 동여매고는 지치도록 하루 종일 노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덩달아 어머니와 함께 즐겼다. 

어머니는 시작부터 끝까지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하루 종일 놀았는데도 그 흥이 쉽게 가시지 않는지 마을로 돌아오고서도 몇몇은 우리 집에 남아 노래와 춤으로 어둠을 불러들였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힘든 청춘에 흥을 낼 만한 유일한 놀이였던 것 같다. 내 몸에도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끼가 있나 보다. 춤추고 싶은 흥이 있었다. 부모의 유전자가 어디 가겠는가 싶다. 

가끔 여행을 가게 된다. 여행지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내 어깨도 으쓱으쓱 흔들린다. 여건이 여의치 않으면 어깨만 들썩이다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일행이 있는 경우는 춤추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무리 속에서 한바탕 신명 나게 놀고 싶다. 가끔 곁가지로 어울려 즐길 때도 있다. 같이 간 남편은 나를 보며 멀찍이서 웃고 있다. 일단 포기한 자세다. 한바탕 놀고 나면 뭔가 홀가분한 기분이다. 여행지의 유적지나 문화를 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그 여운이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자발적인 나의 몸과 영혼의 끌림으로 춤을 추고 나면 그것이 아주 오래도록 기억된다. 

요즘은 TV에서 세계 곳곳을 다 보여준다. 자주 보게 되는 방송이다. 그것도 드론까지 동원해서 사람이 갈 수 없는 곳도 자세히 보여주니 좋다. 사람이 다녀도 볼 수 없는 곳까지 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오히려 많은 곳을 볼 수 있으니 감사할 일이다. 무엇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부족민들의 흥겨운 전통 춤사위다. 지나가던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까지 섞여서 추는 춤은 흥분되게 한다. 춤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몸속에서부터 흥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 나도 TV 속으로 빠져들어 한바탕 어우러지고 싶다. 

나의 춤은 자유롭다. 춤과 몸짓의 경계가 없고 형식이 없는 막춤이다. 때와 장소가 따로 없다. 몸 흔드는 것이 춤이고 그 춤이 나의 은유다. 내 속에 있는 몸의 은유가 춤이 되어 나와 숨을 쉬는 순간이다. 아드레날린의 분비로 내가 나로 사는 흔적이다. 내가 춤을 좋아하는 이유다.

무엇이든 한때인 것 같다. 이웃들은 흥이 많았던 당신을 좋아했다. 그런 당신이 춤추는 것을 본 지가 언제인지 아득하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씩 줄고 있다. 춤이나 노래도 잊어버리고 딸 바라기만 하고 있다. 언제 오냐며 새벽부터 전화를 한다. 어머니를 보러 가야겠다. 반백의 딸이 춤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니, 어머니도 일으켜 세워 당신의 손자 손녀들까지 춤추게 해야겠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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