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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찾아온 휴일 산에 올랐다. 태풍이 지나간 뒤라 신불산 억새평원으로 이어진 등산로는 인산인해였다. 한참 오르다 잠시 쉬는 틈에 휴대전화를 봤다. 세 번의 부재중 전화. 평소 친분이 있던 모 교수는 두 번을 연달아 부재중으로 표시돼 있었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특유의 시니컬함이 묻어 나왔다. "아침에 반구대암각화 쪽으로 왔다가 김 국장이 생각나서 전화했다"는 그의 목소리는 슬펐다. 잠겨버린 암각화에 먹먹한 가슴이 잠긴 듯 숨결이 차올랐다. 그리곤 한참을 물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실 그는 물관련 전문가다. 울산의 치수 문제라면 언제나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해 온 그였지만 최근엔 말수가 줄었다. 

김 국장, 이번 태풍에 수문을 설치한 사연댐을 상상해 보니 끔찍하더군요. 수문을 열고 물 빼는 일을 계속했으면 태화강 국가정원이 어찌 됐을지 딱 눈에 보이더군요…(중략) 그의 목소리는 억새평원 달아오른 가을빛만큼 흥분된 상태였다. 

비 오는 날 냇가에 나가보면 아주 시끄럽게 울어대는 청개구리가 숨어 있다. 그 청개구리가 이야기를 한다. 지금은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예전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아이들에게 묘한 학습효과를 심어준 이야기다. 옛날 옛날에… 부모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반대로만 하던 청개구리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죽으면서 산에 묻히려고, 자식에게 냇가에 묻어달라고 했다. 어머님이 죽고 나서야 불효를 뉘우친 청개구리는 당신의 유언대로 냇가에 묻었다. 그 뒤 비가 오기만 하면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풀숲에 숨어 울고만 있다는 이야기다. 바로 청와전설(靑蛙傳說)이라는 사자성어로 전해지는 옛이야기다. 

유난히 태풍 내습이 잦았던 울산은 얼마 전 태풍 '미탁'의 영향으로 최대 248㎜의 집중호우가 쏟아져 침수 피해가 잇달았다. 태화강은 악몽같은 차바 이후 3년 만에 홍수주의보도 발령됐다. 태화강 홍수주의보는 태화교 수위가 4.5m(해발 기준 3.424m)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면 내려진다. 5.5m가 예상되면 홍수경보가 발령된다. 태화강에 홍수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지난 2016년 10월 5일 태풍 차바 이후 3년 만이다. 다행히 빗줄기가 약해지면서 2시간 20분만인 3일 오전 2시께 홍수주의보는 해제됐다. 시간을 잠시 되돌려 보자. 3년 전 태풍 '차바'로 인한 물폭탄은 울산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시간당 120㎜의 폭우가 쏟아져 태화강이 범람하면서 중구와 남구 등의 도심이 누런 흙탕물로 뒤범벅이 됐다. 태화강변에 세워뒀던 임시 건축물과 주거지의 차량이 불어난 강물과 빗물에 떠내려가는 진풍경을 연출하며 차량 수천 대가 침수피해를 입었다. 울산의 중심에 있는 전통시장인 태화시장과 우정시장이 물에 잠겼다. 현대차 등 일부 공장들이 가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치수는 위정의 근본이라 했다. 그래서 먼 옛날부터 제왕은 치수를 첫째로 여겼다. 말이 나온 김에 치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인류에게 치수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치수(治水)를 잘하는 통치자는 언제나 유능한 통치자로 이름을 높였고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물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성공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힘든 시기였던 대공황 당시, 국가적 위기를 후버댐 건설이라는 뉴딜정책으로 극복한 루즈벨트 대통령도 치수에 능한 통치자였다. 경제 위기로 미국 전역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사회 불안이 계속될 무렵 루즈벨트는 '치수'를 통한 경제부흥을 기획했다. 

중국에서 운하의 역사는 고난 그 자체다. 전설 속의 이상적 통치자인 요왕과 순왕도 물길을 다스리는 데 탁월한 통치자였다. 요왕과 순왕은 인자한 성품으로 백성들을 감화시킨 것은 물론 당대 백성들의 가장 큰 현안이었던 황하의 홍수조절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들은 황하의 범람을 막고 나아가 물길을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 지금의 운하 격인 물막이 공사와 물길을 새로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

치수는 물을 다스림이 아니라 순리에 거스르지 않는 이용을 핵심으로 했다. 그래서 치수의 시작은 홍수를 극복하는데 있었고 그 업그레이드 버전이 댐과 운하라는 인공물로 이어졌다. 이제 울산의 치수 문제를 짚어보자. 바로 태화강 이야기다.

울산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로 단시간에 급성장을 이뤄냈다. 말 그대로 태화강의 기적이다. 개발의 중심에 물은 필수다. 그래서 태화강은 바닥까지 경제개발에 이용됐다. 모든 개발사업과 공공사업은 치수가 아닌 이수에 초점이 맞춰졌고 물을 이용한 개발은 당연히 훼손의 길을 재촉했다. 오염은 필수였고 태화강의 상징인 은어와 숭어의 떼죽음은 필연이었다. 오폐수에 오염물까지 덮친 생명의 강은 죽음의 강이 됐고 박정희식 '검은 연기' 경제개발은 차라리 오염이 영광이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지방정부가 정화에 팔을 걷은 것은 지난 2002년이다. 그로부터 5년간 1차로 작업한 태화강 하상준설 및 정비사업이 시작이었다. 곧바로 국비지원이 이어졌고 가정오수관 연결사업 및 민관의 하천 살리기 운동이 동력을 얻었다. 10년의 세월 동안 엄청난 국비와 민관기업의 수고가 더해지자 태화강의 낯빛이 달라졌다. 수질 1급수, 꿈의 수치가 시민들의 얼굴을 펴게 하자 연어가 돌아오고 수달이 뛰놀았다. 그리고 다시 10년, 태화강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울산시민의 자랑이 됐다. 그 결과물이 바로 태화강 국가정원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국가정원 지정 당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홍수문제가 올여름 민낯을 드러냈다. 차바 당시 울산시는 태풍 피해 이후 근본적인 치수계획을 마련하는 등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른바 '울산시 유역종합치수계획 수립 용역'이다. 정부는 기꺼이 25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울산시 전역(1,060.9㎢)을 대상으로 용역에 나섰다. 그리고 일부 사업을 진행했다. 피해가 컸던 태화·우정시장에 대해서는 집중호우에 견딜 수 있도록 배수펌프장과 유수지를 설치하고 장기적으로 회야댐과 대암댐의 홍수조절 능력을 강화하는 대책에 착수한 상태다. 차바 당시 폭우가 30분만 더 왔다면 태화강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근본적인 원인은 치수대책이다. 지방의 하천은 대부분 50~80년을 기준으로 홍수빈도에 맞춘다. 사람의 한평생에 한 번의 홍수를 만난다는 가정법이다. 하지만 최근 울산은 몇 년 사이에 두 번 이상의 집중호우와 만났다. 기후변화로 집중호우는 더 강력해지고 또 잦아지고 있다. 태풍 역시 자주 만난다. 한 세기에 한 번 올까 말까라던 대재앙이 이제는 해마다 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집중 호우로 인한 물의 도심 유입량을 줄이는 방안이 발등의 불이 된 시점이다. 

문제는 울산지역 댐의 경우 대부분 수위조절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울산의 4대 댐의 총 저수용량은 8,500만㎥이다. 대곡댐이 2,700만㎥로 가장 많고 사연댐 2,400만㎥, 회야댐 2,100만㎥, 대암댐이 1,300만㎥다. 4개 댐을 모두 합치더라도 소양강댐(총저수량 29억㎥)과 충주댐(〃 27억5,000만㎥)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고, 인근의 운문댐(〃 1억3,500만㎥)과 진주 남강댐(〃 1억800만㎥)에도 미치지 못한다. 밀양댐(7,360만㎥)과 비슷할 정도로 소규모다. 홍수조절 기능이 있는 수문이 설치된 곳도 대곡댐뿐이다. 사연댐은 천상정수장으로 가는 관로와 공업용수 관로를 통해 하루 62만㎥의 수량 조절이 가능하다. 회야댐과 대암댐은 물이 차면 월류하는 기능밖에 없다. 큰비가 오면 회야댐과 대암댐 바로 밑의 피해가 큰 이유가 이 때문이다. 

다시 어제 필자의 산행을 잠시 쉬게 한 전화 통화로 넘어가 보자. 호질기의(護疾忌醫)라고 했다. 골수에 병이 깊어 가는데도 의사한테 보이길 꺼린다면 최악의 순간과 빠르게 대면하는 일은 당연한 수순이다. "병이 피부에 있을 때는 탕약과 고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골수까지 들어가면 사명(司命 ·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는 고대 전설 속의 신)도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환우는 후회하지만 편작은 떠나가고 없다.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하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우매한 단견인지 몇차례 태풍은 큰 바람 소리로 뒷통수를 쳤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을 이용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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