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옥상의 가을

이상국

옥상에 올라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흙의 피가 들어 있다
피는 따뜻하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
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이상국 :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에 '겨울 추상화'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동해별곡'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시선집 '국수가 먹고 싶다' 등이 있다. 백석문학상, 민족예술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박재삼문학상, 강원문화예술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
 

수확의 계절에 산등성 달이 떠 있다. 무량한 시간을 지나는 문상 길이다. 손에 잡힐 듯 가슴을 열어 품고 싶은 저 풍성함이 여유로울 것 같지만 외롭고 쓸쓸한 걸음으로 읽힌다. 보름으로 가고 있는 달은 홀로 산을 걷는 중이다. 쓸쓸한 가을 환절기에 세상을 떠나는 소식이 오늘따라 잦다. 그 예쁜 설리도 가고…. 가을을 보내는 것은 기쁘거나 슬프거나 삶의 계절을 넘기는 이별의 아쉬움이나 아픔도 따라온다. 가을이 잘 보이는 옥상을 좋아하는 시인은 삶의 가을을 지나면서 달밤에 깨를 터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우리 집 옥상에도 가을이 왔다. 그 따갑던 햇살이 많이 물컹해졌다. 노란 물탱크 아랫부분을 잘라 흙을 부어 만든 텃밭에 고추 몇 포기, 가지 두어 포기, 자생한 개머루 그리고 상치까지 싱싱하고 순한 손 쉬운 미니농장이다. 또 저절로 터를 잡은 자소엽이 붉은 이파리를 계절만큼 키우더니 마른 대를 세우고 생명을 다하고 눕는 나름의 아름다운 수확도 있다. 계절 바뀌고 흙을 다시 고르고 알이 실한 쪽파를 심는다. 링링이 가고 타파와 미탁이 지나가자 물을 듬뿍 먹은 뿌리는 싹을 틔워 파란 얼굴을 내민다. 가을 햇살은 느리게 다녀간다. 텃밭에는 흙의 피가 따뜻하게 돌 것이다. 옥상에서 계절의 끝과 시작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기억의 소리가 옥상으로 지나간다.
  한영채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