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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북구가 추진 중인 기박산성 의병 역사공원(가칭)조성사업이 차질을 빚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유는 어이가 없다. 기존 조성된 시설물 철거와 관련해 관계 당국 간 이견 차이가 갈등의 원인이란다. 

울산 북구청은 역사 및 관광자원 활용을 위해 선거관리위원회에 공원 내 공명선거 표지석 등 시설물을 철거해달라고 요청하고, 선관위는 "수 십 년간 공원을 관리해왔는데 무단 점유한 것 마냥 자진 철거를 요구해 당황스럽다"는 입장이다. 북구는 기박산성 의병 역사공원 조성사업 추진자문단 회의를 통해 시설물별 설치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해당 사업 부지가 임란 역사상 최초 의병 주둔지라는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소공원을 역사공원으로 탈바꿈하는 만큼 이와 관련되지 않거나 오래된 시설물에 대해서는 철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당연한 결정이다.  

문제는 기존 시설물을 관할하는 선거관리위원회의 반발이다. 선관위는 공원에 위치한 공명선거 표지석, 정자 등 시설물들에 대해 철거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울산 북구는 지금까지 공명선거를 위한 홍보 목적으로 부지를 활용했지만 이제는 이곳과 함께 우포석보, 우가봉수대, 신흥사 등 임란 관련 유적지를 하나로 묶어 '역사 벨트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철거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선관위 측은 17년간 해당 부지를 공명선거공원으로 조성·관리했기 때문에 철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선관위는 지난 2002년부터 울산시와 협의해 역사공원 전체 부지 중 하부는 기령소공원으로, 상부는 공명선거공원으로 활용해왔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박산성 유적지는 지난 6월 울산시도시계획위원회에서 역사공원으로 선정돼 통과된 바 있다. 이 지역은 임진왜란 당시 울산 의병 주둔지이자 격전지였다. 이 때문에 기령 소공원을 '기박산성 의병 역사공원'(가칭)으로 변경하는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 일대가 역사공원 변경됨에 따라 울산 북구는 관내 우포석보, 우가봉수대, 신흥사, 기박산성 등 임진왜란 관련 유적지를 하나로 묶어 역사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역사 벨트화' 사업에 나선 상황이다. 

이곳이 역사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지난봄 북구를 찾은 정재숙 문화재청장과의 교감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당시 북구청은 정 문화재청장에게 "유포석보, 우가봉수대, 신흥사, 기박산성을 역사벨트화하면 훌륭한 역사문화자원이 될 수 있다"며 문화재청의 관심과 예산 지원을 부탁했다. 또 신흥사 삼존불좌상과 복장유물의 국가지정 문화재 지정도 요청했다. 이명훈 기박산성 임란 의병 추모사업회 연구위원(고려대 명예교수)는 "기박산성 의병 이경연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썼던 '제월당실기(霽月堂實紀)'에는 1592년 4월 23일 울산 기박산성에 제단을 설치해 의병의 출진을 하늘에 알렸다는 내용이 나온다"면서 "같은 달 24일 조선왕조실록에는 곽재우 장군이 전국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고 돼 있는데, 비교해보면 기박산성 의병 결진이 곽재우보다 하루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하루 앞선 의병 봉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지역의 귀중한 역사적 사실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묻혀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실 울산은 의병의 고장이다. 울산을 충의의 고장으로 만든 주역인 울산의병이 재조명되어야 할 시점에 온 셈이다. 

임진왜란 당시 벼슬아치들이 달아나기에 급급할 때 울산의 선조들은 서슴없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왜군 20여만 명이 조선을 침략해왔다.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동래성이 위태롭자 울산 병영성에 있던 경상좌병사 이각과 울산군수 이언함은 동래성으로 달려갔다. 전투를 하기 전에 이각은 달아났고, 이언함은 왜군에게 붙잡혔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백성들과 함께 장렬하게 산화했다. 이각은 병영성에 돌아와 재물을 빼돌리고, 첩을 도피시킨 뒤에 또 달아났다. 

4월 17일경 울산읍성과 병영성은 차례로 무너졌다. 울산의병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4월 23일 기박산성에 1,000여 명이 결집했다. 인근 고을의 의병과 함께 5월 10일의 병영성 기습공격을 시작으로 공암(북구 신명 공암마을)전투와 유포, 달현, 전천, 개운포와 경주의 개곡, 모화, 영지, 노곡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멀리는 영천과 안동전투에도 참가해 용맹을 떨쳤다.

전쟁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울산을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78명을 선무원종공신으로 책봉했다. 충의사가 지어져 임란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역의 의병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이 왜 분연히 일어서 어떻게 목숨을 바쳤는지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곽재우로 대표되는 의병의 역사를 좇았을 뿐 지역의 의병사는 소외됐다. 울산의 의병사를 재조명하고 이를 역사의 분명한 사실로 알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역의 자긍심과 올바른 역사의 기록을 위해 선관위도 대승적 차원에서 시설물 철거에 협조해야 한다. 물론 대체부지나 이전에 북구청도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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