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님표 문장부호
시누님표 문장부호
  • 울산신문
  • 2019.10.1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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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의 시누님과 '카톡'을 시작한 지가 반년쯤 된다. 남편의 칠순잔치 초대장을 휴대전화로 가족들에게 발송했다. 금방 "카톡" 하고 성급한 답이 왔다. 남편의 남매 중 최고령인 둘째 시누님이 참석하시겠다는 답장이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다는 답신을 드렸다.  

그 후로 좋은 정보와 시누님의 일상 중 일부를 종종 톡으로 보내신다. 열의가 대단하시다. 새로운 것을 익히는 일은 젊은 사람도 귀찮아하는데 적지 않은 연세에 휴대전화의 다양한 기능을 익혀 활용하시다니 놀랍기만 하다. 

톡을 주고받은 지 열흘쯤 지나서인 듯하다. 보내온 문자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검은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문장부호다. 서너 음절이 지날 때마다 마침표가 있었다. 

아뿔사! 그 문장부호의 행간에 시누님의 고민이 보인다. '야는 글자 사이에 점을 찍어놓았네. 글 쓰는 사람이니까 점을 찍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어디다 찍어야 하노? 이 정도 하면 되겠제' 하시면서 점을 찍으신 것 같다. 서너 음절마다 '시누님표' 문장부호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은 순전히 나의 글쓰기 습관 때문이다. 처음 습작을 할 때 문장부호를 무시하고 글을 썼던 버릇 때문에 문장부호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아예 무슨 글이든지 문장부호를 사용하면서 그 행위가 글쓰기 속에 버릇으로 굳어 버렸다. 나의 이런 습관이 시누님의 '톡놀이'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처음으로 문자가 왔을 때는 문장부호는 없지만 띄어쓰기와 오탈자가 없는 읽기 편한 SNS에서의 전형적인 문장이었다. 그러나 몇 차례 문자가 오가면서부터 시누님의 문자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문제의 문장부호가 등장한 것이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던 문장에 '파리똥' 같은 마침표가 서너 음절마다 자리 잡으면서부터 나는 시누님의 문자를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문장을 바르게 재조합하는 일과 본래 전하고자 하는 정보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었다. 처음엔 시누님의 특별한 문자는 나에게 특혜인 듯 즐겁게 읽고 답을 드렸다. 매번 문장부호를 어느 구간에 배치할지 고민한 흔적이 보여 문장의 옳고 그름보다 '생각하는 순간'에 의미를 두며 문자 친구를 계속 이어 가고 있다. 

나는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시누님과 톡을 주고받는다. 아침에도 건강정보를 보내셨다. 당연히 나는 감사의 인사를 띄웠다. 다시 시누님 방식의 문장으로 톡이 왔다.

"그래. 건강에. 좋다니 한번보내. 봤다"

보내기를 누르고 난 뒤 시누님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야가 말이 없는 걸 보니 내가 제대로 점을 찍고 있나 보네"라고 하실 것만 같다. 미소가 절로 번진다. 시누님의 문장부호가 어디에 찍혀도 내 눈에는 완벽한 문장이다. 시누이와 올케 사이를 부드럽게 엮어주는 더없이 곰살맞은 점으로 보여서다.

나와 띠동갑인 시누님은 시집왔을 때 살림살이의 멘토였다. 나이가 꽉 차서 결혼했지만 매사에 서툴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치 있는 시누님은 현장 탐방을 해가며 좋은 물건 고르는 법과 가격 흥정하는 것까지 확실하게 가르쳐주셨다. 그러니까 간이 크게도 신혼 초부터 '시'자의 상징과 같은 시누이에게 나의 약점 덩어리를 통째로 안겨드린 셈이다. 그렇지만 내 눈에 시누님은 언제나 곱고 지혜로우며 사려 깊어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가 되는 분으로 보인다.

어느덧 마흔 해가 지나고 고운 할머니가 되어 거동도 줄어들고 적적한 시절에 접어드셨다. 다행히도 호기심과 학구열이 여전하신 데다 시력까지 좋아 문명의 이기를 잘 활용하시는 듯하다. 그중에 스마트폰을 으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젊은 사람 못지않은 듯하다. 게다가 나의 무심한 행위가 시누님의 왕성한 호기심에 날개를 달아드린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의 일은 긍정의 이면에 그와는 다른 동네가 있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혹여 시누님께서 다른 사람과의 문자에도 문장부호를 그렇게 사용하고 계신다면 그냥 있을 일이 아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즐겁던 시누님의 문자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그 점 하나가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점 하나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선문답 같은 현상이 어우러져 날마다 법석을 떠는 무대가 세상이고, 그 세상은 보이지 않는 인간의 다양한 내면에서 생산된다.

아직 안방 노인이기를 거부하는 호기심 왕성한 시누님이다. 어쭙잖은 글쟁이 올케의 대책 없는 습관이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이 주는 재미에 푹 빠진 시누님께 누가 될 것만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퇴근 후에 시누님을 찾아갈까. 가서 자연스럽게 이해를 돕는 법도 생각해 본다. 아니다. 더 바람직한 방법이 있을 거야. 잔머리 쓰는 내 꼴을 보더니 남편이 웃는다.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맞다, 큰질녀. 그래, 시누님의 큰 딸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잘할 수 있을 거야"  

점 하나의 의미를 갈파한 대중가요를 귓등으로 들은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그 의미심장한 점이 인간사를 꿰뚫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일인 듯하다. 겉보기엔 무의미한 듯한 시누님표 점 역시 어느 곳에 자리를 잡든 나에게는 최고의 힘을 가진 완벽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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