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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묵이다. 여권의 독주기관차가 엔진음이 요란할 때 잠시 결집하던 보수층이 다시 제자리다. 자유한국당의 헛발질이 원인이다. 막말에 안하무인, 초딩 수준의 정국대응이 자초한 결과다. 시작은 표창장이었지만 대표가 기름을 부었다. 황교안호의 영입 1호가 '갑질장군'  박찬주라는 보도가 나가자 한국당 내부에서부터 비판이 터져 나왔다. '조국 낙마 표창장'과 '벌거벗은 대통령'에 이은 연타석 루킹 삼진감이다. 

의욕적으로 추진한 신진인사 영입이 오히려 이미지 타격으로 이어지자 당내에서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삭발투혼으로 보수층을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자부한 황 대표는 멈칫한 상태다. 자신이 삼고초려해서 모셔온 인사가 당내 반발로 영입보류로 이어진 것은 자책골이다. 이번 사태를 진두지휘한 중진들의 반발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박찬주 영입이 공식화되자 조경태·정미경·김순례·김광림·신보라 최고위원이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박맹우 사무총장을 만나 박찬주는 인재영입 1호 상징성에 어긋난다고 대못을 쳤다. 

문제는 격에 맞지 않는 인사를 영입 1호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 영입 1호로 삼고초려한 안목이다. 박찬주 모시기에 열을 올린 황 대표는 논란이 일자 "보도된 내용들이 맞지 않다. 한분 한분 설명이 있을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갑질장군이 무죄를 받았으니 현 정권의 핍박이 확인된 것이라는 진영논리가 먹혀들 것이라 착각했다. 

아뿔싸 갑질장군의 무죄는 판결일 뿐, 푸른 청춘을 군에서 보낸 젊은층의 정서를 읽지 못했다. 갑질이 유무죄를 다투는 것과 갑질의 행위 자체는 다르게 봐야 한다는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꼰대식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한때는 그랬다. 상대의 진영논리로 핍박받은 자를 망토 걸쳐 환영하면 반대급부가 상승기류를 탔다. 그래서 적진에서 치명상을 입은 장수이거나 병사까지도 얼른 보듬어 붕대로 감고 링거로 몸을 데웠다. 그리고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거나 부축을 받으며 우리가 함께하리라며 격하게 환영했다. 조응천이 그랬고 표창원이 그랬고 멀리는 병풍사건의 주인공 김대업이 그랬다. 민주당에서 정의의 사나이로 추겨 세운 김대업은 최근 사기사건으로 필리핀에서 압송돼 수사를 받고 있다. 거짓으로 드러난 김대업의 폭로는 한 시대를 흔들었지만 거짓폭로와 대선판 요동은 과거일 뿐, 노회한 이회창을 살려내진 못하는 법이다.

영입인사이거나 우호적 인사로 추켜세울 인사는 대체로 상대와 대척점이 강할수록 효과를 보기 마련이다. 그래서 황 대표는 박찬주를 영입 1호로 찍었겠지만 그 안목은 벌거숭이가 됐다. 길에 떨어진 물건이 아무리 탐이 나도 내 것이 아님을 제대로 살펴야 뒤탈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공짜는 뒤탈을 부른다. 자승자박이다. 보수정치의 복원을 희망하는 이들은 지금의 자유한국당이 이런 판단력 때문에 뒤웅박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표창장과 벌거숭이 임금에 이은 세 번째 자책골이다.

표창장 논란과 패스트트랙 수사 대상자 공천 가산점 논란은 자유한국당의 현재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국 사퇴 직후 나경원 원내대표는 청문위원들을 추켜세우며 표창장과 상금을 수여 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그리곤 한 발 더 나이가 당을 위해 온몸을 던진 패스트트랙 수사 대상자에게는 공천 가산점이라는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공언했다. 최근 당의 지지율이 상승세에 있다는 뒷배를 믿고 허리를 너무 젖혔다는 평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대로 가면 허리가 꺾일 게 뻔하다는 소리가 나오는 순간 '벌거벗은 임금님' 동영상이 돌았다. 

표창장과 금일봉에 이어 벌거숭이까지 나왔는데도 당 일각에서는 그게 뭐, 어때서라는 반응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속옷까지 벗기고 망측하게 욕을 보여 놓고 낄낄대던 자들이 지금의 여권 아니냐며 내로남불이라고 눈을 부라린다. 맞는 말이다.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 된다는 논리가 지금의 민주당이라는 말은 이미 보편성을 획득한 문장이다. 문제는 그때 그랬으니 지금도 똑같이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다. 뒷걸음질 치는 정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눈에는 눈 식의 대응은 저급하다. 정치에 급수를 따지는 게 우스운 일이지만 굳이 벌거숭이로 대응하는 건 스스로를 진창에 담그는 일이다.  

까놓고 이야기하면 한국당이나 민주당이나 오십보백보다. 그렇다고 표창장 주고 용돈 얹어주는 일이 당연시되는 것은 곤란하다. 대통령의 옷을 벗기고 조롱거리로 삼으면서 우리만 그랬나 뭐, 라고 뒤통수를 긁적이면 태극기부대와 다를 게 없어진다. 

당 내에서도 비판은 날카롭다. 수도권 4선인 신상진 의원은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태의 원인을 영남권 민심에만 지나치게 편중한 당 지도부의 오판에서 찾았다. 그는 "지지율 상승에 방심하는 지도부의 분위기 때문에 이런 결과들이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당 대표, 원내대표뿐 아니라 참모진은 영남권 민심만이 아니고 수도권, 자유한국당에 비호감 가진 많은 국민들의 심정을 헤아리도록 폭넓게 의견을 수렴해서 일처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의원처럼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내부자들이 있다는 것은 자유한국당의 희망이다. 민주당이 조국사태 이후 연거푸 자책골을 넣었지만 이철희와 표창원 의원의 불출마 선언이 더 이상의 지지율 하락을 막았다는 진단은 정확하다. 자유한국당은 바로 이 지점에서 냉정해져야 한다. 

40%의 지지율을 회복했다며 파안대소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대통령의 오만, 집권당의 독선이 야당의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탄핵 사태 이후 길을 잃어버린 중도층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은 청와대와 여권의 자충수가 아니다. 왜 다시 자유한국당을 지지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야 장롱 깊숙이 넣어둔 빨간 마후라를 끄집어내게 된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장롱문을 열 이유가 불분명하다. 

대한민국 보수 정치를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자유한국당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던 이들의 공통된 생각은 한심하다는 푸념이다. 보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보수 흉내만 내는 이들이 바로 자유한국당이다. 그러니 표창장을 주고 갑질장군을 영입 1호로 거론한다. 

그것도 모자라 대통령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낄낄거리고 조롱한다. 국가원수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고 호통치던 자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국가원수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이런 저급한 방법으로는 흩어진 보수를 다시 모이게 만들지 못한다. 탄핵 직후 이 땅의 보수들은 하나같이 구덩이를 파고 얼굴을 처박았다. 부끄러움 때문이다. 스스로 믿었던 가치가 도륙당하고 벌거벗기자 햇살이 두려웠다. 그래서 숨어들어 책망의 시간을 보냈다. 고맙게도 그 염치를 조국이 상쇄해 줬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이 부끄러워 죽을 거 같은 이를 향해 말간 얼굴로 정의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왔다. 그래서 다시 보수는 재건을 이야기하게 되고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그런데 딱 그 지점에서 모든 게 멈췄다. 아니, 뒷발질을 하기 시작했다. 삭발로 결연함을 보였던 순간, 머리카락만 자른 게 아니라 과거와 단절을 선언해야 했지만 시기를 놓쳤다. 탄핵주도세력부터 친박과 진박, 수박까지 박근혜 전 대통령 주변에서 물개박수를 쳤던 이들은 모두가 스스로 정치적 사망선고를 하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전혀 그런 일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보수는 자신이 믿는 가치와 전통을 지켜가면서 개혁을 하려는 세력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다. 자신이 믿는 가치와 전통을 움켜쥐고 안방에 틀어박히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골통이다. 세상과 마주하고 변화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보수가 진정한 보수다. 가치와 전통을 지키는 것은 신념으로만 되는 일은 아니다. 그 힘은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동성에 있다. 능동성은 자기 자신과 매일 밤, 매일 아침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나오는 내공이다. 가치와 전통을 지키되 변화에 주저하지 않는 능동성이 보수의 본질이다. 무작정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며 상대의 헛발질을 학수고대하는 이들은 보수가 아니라 폐족잔당이다. 그들이 믿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나무에서 홍시 하나 툭 떨어지는 시간이다. 달콤한 감 떨어질 때를 기다리며 입만 벌리고 있는 여의도의 밥버러지가 너무도 많기에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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