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평소 사회 정의와 개혁을 주장해 오던 법학 교수가 청문회에 서자 위선적으로 드러난 그의 사적인 삶에 많은 국민들이 배신감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이번 조국 사태를 통해 그가 경제적으로 잘 살았지만 윤리적으로 바르지 살지 못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과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라는 주제로 수년 전 대학생들에게 글쓰기 문제를 출제한 바 있다. 대부분의 학생이 경제적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경제적으로 잘 살아야 하므로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을 포기하며 살기로 결심한다면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청년들의 인생관은 국가 발전에 필요한 사회 건강성의 척도다. 이들의 가치관은 직장인들의 일하는 문화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대충대충 하라. 좋은 게 좋다. 슬쩍 넘어가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직장 조직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고, 이러한 조직 문화가 일반화된다면 그 조직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미 심각한 질병에 걸린 상태라 본다. 

만일 이러한 부정적 의식이 우리나라 학생 교육 기관에 잔존하고 있다면 건강한 민주 시민 형성이라는 청소년 교육목표는 허공의 메아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극단적 사회악이 서서히 배양될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 그리고 엄격한 법 집행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구성원들의 법 감정을 고려해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는 일과 법규의 엄정한 집행이 동시에 이뤄질 때 그 조직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 권한에 상응하는 수준의 윤리적 책임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공직사회에는 아직도 직원들이 업무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 현상에 대하여 법률관계 또는 법적 권리 의무 관계로 인식하기보다는 아직도 도덕적, 관습적, 인간적, 초법적, 호의적 관계로 인식하거나 소위 신사약정(紳士約定)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조직 문화가 청소년 교육기관인 학교에 들어와 있다면 교육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전통적 사제관계와 유교적 스승관은 교육의 권위를 유지하는 긍정적 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교육활동을 법률관계 또는 권리 의무 관계로 성숙시키는데 부정적 요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의 정리주의와 온정주의 문화가 법치주의 실현의 역기능으로 작용해 왔고, 교육 제도나 시책의 합리적 개선으로 연계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제 법치국가에서 교육하는 모든 사람은 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교육하고, 모든 교육활동은 법률관계이며 권리 의무 관계다. 교사의 학생 지도 활동과 교육당사자들의 교육적 요구도 사법심사의 대상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엄정한 법의식과 법 집행은 학교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학교사회 일부에서는 교육이란 미명으로 학생에게 필요하지 않거나 학생과 학부모가 원치 않은 심야 야간자율학습이 강제하는 등 비윤리적 또는 인권 침해적 사례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엄정한 법치주의가 전제돼야 한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잘 살아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찾고, 윤리적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의지가 전제, 추구돼야 한다.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과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일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미 그곳은 학교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자는 이미 교육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정의와 공평과 개혁을 주장하면서 그것을 자신에게는 전혀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학자가 아니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