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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이다. 가을이 살짝 모자를 들어 올리며 작별을 고하고 겨울이 외투 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달이다. 상강을 지난 날씨는 갑자기 싸늘해지고, 해가 짧아져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앞세워 집에 돌아오면서 다시 한번 중얼거려본다. 십일월이네. 벌써, 어느덧, 이제, 어느새 십일월이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기분. 

시월엔 카톡에 간간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같은 가을에 대한 노래들이 올라오더니 십일월엔 그마저 침묵이다. 십일월의 노래는 어디로 갔나. 그러고 보니 아침마다 노래하던 뒷산의 새들도 이제 지저귀지 않는다. 새들의 지저귐은 어디로 갔나. 마지막 가을 햇살을 쬐던 호박벌은. 은빛으로 떠다니던 박주가리 씨앗은.

십일월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무슨 색일까. 황금빛 은행잎과 찬란하던 단풍은 이내 빛을 잃고 갈색으로 변해 땅에 떨어진다. 빽빽하던 숲은 헐거워지고 나뭇가지 사이로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이 보인다. 새파란 하늘과 타는 듯 붉던 단풍이 선연한 대조를 이루던 가을의 절정을 지나, 이제 하늘과 대지는 엇비슷한 색깔로 닮아가고 있다. 손가락처럼 펼쳐진 나뭇가지를 보면 나무와 하늘이 서로 껴안거나 악수를 나누는 것 같다. 십일월엔 저들도 쓸쓸한 것이다.

십일월은 변덕스럽다. 부드럽게 불던 가을바람은 갑자기 사나워져 유리창을 흔들고, 싸늘한 가을비는 어느 날 문득 진눈깨비가 되어 어지러이 흩날린다. 해는 안개 속에서 흐리게 떠 있고, 낙엽은 아스팔트 길을 제멋대로 굴러다닌다. 십일월은 한해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달이다. 노을이 주홍을 지나 보랏빛으로 물들다 점점 어둠에 잠겨가는 저물녘처럼 약속이나 다짐을 이루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짧다. 초조와 불안이 우리를 지배한다. 추수가 끝난 뒤 빈 들판처럼 스산함과 공허가 우리를 압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십일월이 불안과 우수의 달만은 아니다. 십일월은 음력으로 시월에 해당한다. 예로부터 음력 시월을 상달이라고 하였다. 상(上)이란 위란 뜻이니 가장 윗길인 달, 가장 신성한 달이란 뜻이다. 그래서 시월엔 하늘에 감사를 드리는 제천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고구려의 동맹이나 예의 무천, 삼한의 시월제, 고려의 팔관제 등이 시월에 있던 국가 규모의 제천의식이다. 마을의 동제나,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는 묘사도 시월에 지냈다. 이러한 제사는 가을걷이를 마치고 감사한 마음으로 햇곡식과 햇과일을 조상에게 바치며 내년의 풍농을 기원하는 일종의 추수감사제인데, 그러한 경건하고 신성한 의식이 음력 시월, 양력으론 십일월에 행해졌다. 그러니 십일월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달인 셈이다.

이러한 경건한 십일월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갈무리가 아닐까 한다. 갈무리란 일을 마무리하고, 물건을 저장하거나 간수해두는 일을 말한다. 예전엔 가을걷이가 끝나면 농기구는 잘 씻어 헛간에 걸어두고 씨앗은 자루에 담아 광이나 윗목에 보관했다. 김장독을 응달에 묻고 시래기는 잘 마르도록 처마 밑에 걸고, 부엌 구석엔 천장에 닿을 정도로 장작이나 나뭇단을 쌓아두었다. 부지런히 가을을 거두어 겨울 맞을 채비를 하는 것이다. 초가에 새 지붕을 올리고 창호에 문풍지를 바르는 일도 십일월에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우내 쓸 연탄을 들이는 일도 십일월의 큰 행사였다. 연탄이 가득 실린 구판장의 리어카 뒤를 밀며 개선장군처럼 돌아오던 어린 시절의 푸근함이라니. 김장을 묻고, 연탄을 들이고, 마당의 수도꼭지를 헌 옷으로 잘 감고 나면 입동이 지나 어느덧 소설에 이른다. 한해의 첫눈이 내린다. 

아파트에 살면서 시래기를 엮지도, 장작을 패지도 않는 지금은 무엇을 갈무리해야 할까.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이란 그림책엔 겨울을 위해 옥수수와 나무 열매를 모으는 친구들과 달리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는 프레드릭이란 생쥐가 나온다. 프레드릭은 긴 겨울에 재미있는 이야기로 쥐들의 지루함을 달래준다. 프레드릭이 마지막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는 때는 바로 십일월일 것이다. 긴긴 이야기를 준비하며 겨울이 오기 전 한 해를 갈무리하는 달, 바로 십일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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