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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 떠도는 말에 '친절사'란 말이 있다. 요즘같이 빠듯한 세상에 동료나 고객의 사적 편의까지 살펴주는 회사원이나 운전기사 등을 가리킨다고 한다. '친절사', 아무리 많이 들어도 기분이 마냥 좋아질 것 같다. 사전에는 태도가 매우 친근하고 다정한 경우를 '친절(親切)'이라 이른다. 

몇 년 전 문해교사 연수에 강사로 오신 교수님께서 인간관계에 관한 강의 말미에 "업무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가전제품 서비스센터 직원처럼 친절해지는 그날까지 노력합시다"라며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드시던 모습이 꽤 인상에 남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은 감정노동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분의 의도는 아마 진정에서 우러나는 마음가짐으로써의 관계적 태도일 것이다.

이 '진정'의 정 반대편에 서 있는 이가 2005년 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 영화인 '친절한 금자씨'의 '이금자'(이영애)다. 올리비아 핫세와 비교될 만큼 미모가 출중한 스무 살 미혼모로 아이를 유괴했지만, 정작 그 아이를 살해한 사람은 아이의 울음을 못 견딘 싸이코패스 '백 선생'(최민식)이다. 백 선생이 금자의 딸을 미끼로 허위자백을 강요해 그녀는 결국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13년 동안 교도소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금자는 언제나 밝고 상냥하게 남을 도와 마침내 '친절한 금자씨'라 불린다. 그리하여 13년간의 복역을 끝마친 그녀는 백 선생을 찾아가 마침내 복수한다.

여기서 금자의 언제나 밝고 상냥한 '친절'은 같이 생활하던 수감자들의 시각과는 판이하다. 그야말로 자신이 장차 집행할 피의 응징으로써의 복수를 위해 철저히 위장된 '친절'이다. 즉 그것은 약자에겐 '진정한 친절'이지만 악랄한 마녀 수감자나 백 선생을 향하는 순간 처절한 죽음의 칼날인 것이다.   

이처럼 친절은 그 처한 환경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네 평범한 일상에서 친절의 주변을 조금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항시 한 몸인 듯 붙어 다니는 배려와 역지사지, 적극과 긍정이란 위성을 손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은은하고 포근한 그 별빛이 차곡차곡 내려 쌓여 그 빛에 온통 가슴이 젖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그런 아름다운 마을 하나를 필자는 알고 있다. 바로 시인 도종환의 시 '어떤 마을'이다.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 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 소리 별 그림자 / 그 물로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 나면 /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 사람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몇 년 전 중학교 국어 국정교과서에서 만났을 때, 마치 타지에서 사촌을 만난 듯 살갑고 반가웠다. 그렇다. 친절에는 가장 인간적인 구수한 냄새, 착하고 순한 향기가 배어있다.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이 이미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꼭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를 들추지 않더라도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옛말처럼 맘속으로 '나는 친절한 사람'을 되뇌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매사에 부드럽고 정말 친절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속는 셈 치고 다들 아침에 눈 뜨면 곧바로 그 말을 되뇌어보았으면 좋겠다.

예전에 필자는 몇몇 기관의 업무담당자들과 일 때문에 연이어 대면한 적이 있다. 그때 을이었던 필자는 그들로부터 서비스를 받고 있었음에도 다소 딱딱하고 갑갑함을 느꼈었다. 일은 마무리하고 돌아왔지만 그 뒤로 업무가 영 손에 잡히지 않았고 기분이 영 별로였다. 이유를 가만 생각해보니 필자는 사실 그날 평소 별거 아니라고 여겼던 권위의식 혹은 불친절을 경험했던 것이다. 이처럼 친절은 긍정적이고 인간적이며 따뜻하지만, 권위의식 혹은 불친절은 한때 유행하기도 했던 '꼰대스럽다'와도 밀접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관계를 해치고 일방적이며 매우 비생산적이다.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는 명약관화하지만 연륜이 깊어질수록 매사에 오랜 경험으로 익숙한 태도를 높이 사주는 것을 노숙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노숙함이 물기를 잃고 딱딱하게 경직되면 자칫 고집불통이 되기 십상이다. 

복잡하고 다난한 현대는 그런 고집불통 권위의식으로 꽉 찬 꼰대가 발 디딜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비상한 상황에서는 생각과 행동이 창의적이고 말랑말랑해야 문제 상황을 헤쳐나갈 길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권위의식에 잔뜩 젖어있는 사람은 진정한 권위를 경험한 적이 없다. 병원에 간 환자들이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사람들이 일부 의료인이나 법조인들의 불친절을 타인에게 호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그들이기에 전문인들에겐 비록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많이 심각하게 와 닿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그것을 해소하지 못할 때 존경과 권위는 없다. 그들은 눈앞에서 가시적으로만 행동하고 굽힐 뿐이다. 궁금하고 답답한 그들의 말에 보다 열린 마음과 태도로 대했을 때 비록 다 해결 못 해줄지라도 비로소 받아들이고 진정으로 승복한다. 바로 그럴 때 진정한 존경과 권위가 따른다.

친절하면 소통이며 권위와 존경이 저절로 따른다. 불친절은 그 모든 아름다움의 설 자릴 깨트릴 뿐이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의 파랑새는 나부터 친절할 때 품에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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