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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내산의 봉화마을에 있는 저수지는 숲길을 몇 굽이나 돌아야 볼 수 있다. 남해에 그런 외지고 깊은 곳이 있을까 싶은데 넓은 저수지는 발 딛고 선 이곳이 섬이라는 사실을 잠깐 동안 잊게 만든다. 작은 미술관 이름이 바람 흔적이다. 바람개비가 넓은 저수지의 품에 안긴 채 돌고 있다. 앵강만을 지키는 어머니처럼…

잔잔한 수면과는 달리 바람개비는 비를 머금고 돌아간다. 사람 사는 것이 잠깐 스쳐 가는 바람의 흔적 같은 것이라면 좋으련만 무던히 애쓰고 노력하고 보듬어 안아야만 그나마 다치지 않고 바람개비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가게 된다. 섬에서 살아가는 자체가 그렇다.

노도는 이름만으로도 외로운 섬이 된다. 가끔은 잔잔한 호수처럼 먹먹하다. 그것이 앵강만의 이름값이다. 바다는 사발물처럼 출렁이다가도 때때로 풍란의 마당이 되기도 한다.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처럼 평온하던 바다가 감정의 역류처럼 무슨 분노나 품고 있나 싶기도 하다. 사람 사는 일도 그와 같지 않을까.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울고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있다. 추적추적 빗속에 어머니가 나와 있다. 딸을 배웅하려는 것이다. 아니 몸으로는 보내고 마음으로는 보내지 않으려는 것일 게다. 비옷도 입지 않고 그 흔한 우산 하나 쓰지 않았다. 바다 쪽으로 있는 밭 들머리에 한 발을 걸치고 앉아있다. 밑에는 자칫 잘못하면 구렁이다. 그래서 불안하다. 애써 비를 피하지 않고 아슬아슬한 자세로 꿈쩍도 않는 것은 마음까지 속속들이 구렁이라는 뜻이다. 

바다는 가시밭이었던 어머니의 삶을 늘어진 뱃살처럼 층층이 접어 수장시킨 곳이다. 그래서 떠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떠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또한 앵강만이 품은 섬이다. 그 섬이 어머니를 품었다.

노도는 언제나 그랬다. 흥분과 기대감이 가득하면 그 이면에는 여려나 좌불안석도 가득했다. 눈물이 짓무르도록 자식을 반기던 내 어머니를 또 어찌 두고 돌아가야 되나 하는 시린 가슴이 들어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노도는 언제나 사람들을 그립게 만드는 곳이다. 살고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가 그렇다. 그곳에서 태어나서 안태를 묻고 살아온 걸음들이 삶의 길이 되었다. 속속들이 껴안고 붙박이로 섬을 섬기고 사는 사람이라고 그리움이 없겠는가, 그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기다림이란 이상한 병이 있다. 아마 그 병의 완치는 어려울 것 같다. 

접어진 당신의 한을 앵강만에 다 풀고 나면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질까. 박꽃같이 멀건 눈에서 또는 머리에서 격리된 기억으로 살았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자다가도 동난 기억으로도 찬물 한 바가지를 들이켜 속을 식힌다고 한다.

비는 거칠 기미가 없고 아무리 손사래를 쳐도 어머니는 일어서지 않는다. 당신의 가슴에도 마른 비가 내리고 있다는 증거다. 핏덩이 딸아이를 안고 막막한 앵감만을 돛배로 건넜던 그 위태로웠던 청춘의 가시밭에 내가 있었다. 나는 당신이 살아야 하는 끈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끈이 영원한 업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살았던 내가 당신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기도 했다. 내려서 바다에 잠수하는 빗물처럼 어머니의 가슴 곳곳에 스며들어 외로울 때 가끔은 웃음이 됐으면 좋으련만 앵강만의 언덕에서 언제나 바람개비처럼 오래된 기억만 되돌리고 있다.

뱃길에 눈을 주는 당신을 두고 배편에 몸을 실었다. 섬을 떠나는 사람들을 실은 배가 물살을 가르면 길을 낸다. 분명 어머니의 눈길도 뱃길 따라 길을 나서지 싶다. 수십 번도 더 떠나고 싶었던 섬에서 어머니는 결국 앵강만을 지키는 섬이 됐다.

앵강만은 다 품었다. 떠나온 사람과 떠나지 못하고 사람이 머물고 있는 노도라는 작은 섬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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