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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정자

손영희

느티나무 정자가 하루 종일 성업이다

노숙을 자처한 살림살이도 한 몫 하는

딱 한 평 저승꽃 만발한 마을 속의 섬

저 명품에 끼지 못한 어정쩡한 나는

발치에 걸터앉아 귀동냥 삼매경인데

느티가 저녁이 가깝다며 그늘을 거둬들인다

△손영희 시인: 매일신문신춘문예(03) 시집 『불룩한 의자』 『소금박물관』, 현대시조 100인선 『지독한 안부』, 오늘의 시조시인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경남시조문학상 수상.


정자리 마을에는 키 큰 느티나무가 있어 마을 어른들에겐 큰 위안이 된다. 그 아래 작은 정자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아침부터 재미난 이야기로 몇 개 안 남은 하얀 이를 내보이며 활짝 웃는다. 집으로 돌아가 봐야 밤새 혼자 잠을 청했을 노인들인데도 무에 그리 또 복된 이야기가 많을꼬. 이농 현상으로 농촌은 나이 70은 새댁이라 불리지만 인정과 서로의 돌아봄은 예전보다 더 도탑고 살갑다.

하루 종일 느티나무 아래에서 점심도 간식도 나누고 또 지나가는 영감도 불러 막걸리도 들이킨다. 삶이란 이제 다 도를 통한 그들만의 동문서답도 흉이 되지 않는다. 여기 와서 바쁘다느니 집안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느니 하는 말은 사치다. 그저 구름처럼 하얗게 빛바랜 머릿결을 나부끼며 서를 다리에 머리를 베기도 하며 흥겨운 장단에 박수를 치며 노랫가락 한 소절 뽑는 것만으로 최고 절정의 명품 시간을 지금 그들은 보내고 있는 중이다.

이서원 시인
이서원 시인

느티나무의 저 너른 품을 처음부터 보아온 그 시절부터 저승꽃이 만발한 지금에 일러서도 보듬어주는 한량없는 여유 앞에서 생의 끝자락을 향해 달리는 시간은 그저 무의미한 흐름에 다름 아닐터. 저 아름다운 모임에 끼지 못한 타지에서 이사 온 시인은 못 본 척 지나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생의 깊은 이야기를 나눌 처지도 못 된다. 다만 엉덩이 반쯤 걸치고 살아온 이야기에 귀를 열고 듣는 것만으로도 한 자리 차지하는 호사를 누린다. 어른들의 며느리 흉보기나 자식 자랑이라도 처음 듣는 것인 양 함께 맞장구쳐주고 같이 욕도 하고 칭찬도 하다 보면 금방 노을이 깔린다.

"느티가 저녁이 가깝다며 그늘을 거둬 들인다" 아쉽지만 느티나무는 슬며시 그늘을 거두며 발치 아래에 어둠을 내린다. 이 종장이 절묘하다. 과하거나 넘치지 않을 꼭 그만큼에서 멈추라는 무언의 말에 하나둘 밀고 온 유모차를 다시 앞세우며 내일을 기약하는 할머니들의 숭엄한 헤어짐, 이 이별이 결코 오늘 마지막이 아니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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