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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은 조용하기만 하다. 드문드문 오는 방문객은 작가에게 그나마 위로가 되겠지만 그 동안 준비한 과정에 비하면 실망스럽다. 그림에 관심 있어 질문을 하시는 분은 작가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다. 

"이 새는 어떤 의미예요?" "왜 머리만 그린 거예요?" "숲에 담긴 의미가 뭐예요?" 등 궁금한 것이 많으시다. 돌아갈 때는 "따뜻한 그림 잘 보고 갑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여 말한다. 

작가 또한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울산은 광역시이면서도 문화를 향유하는 수준이 낮고 소득이 높으면서도 문화를 소비하는 빈도도 낮다. 이런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몇몇 분이 말을 한다. 서울이나 선진국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전시를 보러 갤러리를 방문하고 예술작품에 대한 감흥을 바탕으로 감상하고 구매도 한다고.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어"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다. 맞는 말이긴 하다. 수긍은 가지만 우리가 받은 교육으로는 문화적 선진국의(경제적인 선진국과는 다른 의미) 형태를 쫓아가기는 힘들 듯하다.

어느 교육 프로그램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그림 기초반을 가르치는 기회가 있었다. 수강생들 중 일부는 학창시절 정말 그림을 너무 못 그려서 용기를 내어 왔거나, 어릴 때 그림의 꿈을 접었거나, 현재의 일에 도움이 될까 해서 오셨다. 이 분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은 학창시절 너무 경직된 예술교육이 스스로 자신을 주눅 들게 해서 감히 그림 그릴 엄두를 내지 못했고, 재능 있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예술교육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때마다 나오는 말들이다. 오래 전부터, 아주 옛날부터….

큰아들은 그림을 잘 그렸다. 초등학교 다닐 때 엄마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또래에 비해 입체적인 그림을 잘 그렸고 상도 제법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그림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학교 미술 수업이 기능 교육 중심이었고, 국영수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수업시수를 메우기 위한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전공자로 시키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을 그리려는 흥미가 현저히 떨어졌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예체능 수업은 아예 애물단지로 취급돼 가치 없이 다뤄졌고 2학년부터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과목이었다.

다시 돌아와서 얘기하자면, 문화적 선진국의 아이들은 어릴 때 어떤 예능 교육을 받았을까를 묻게 되고, 그렇게 배운 어른들은 예술 감상을 어떤 시각으로 할까 되짚어 보게 된다. 문화예술은 오랜 세월 쌓이고 쌓여서 단단해지고 깊이 있는 모습으로 다져진다. 울산은 문화예술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아직 요원해 보인다. 이미 현존하는 문화예술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보여 주어야 할까.

무분별하게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방식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지역에서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발전시킨다면 예술은 대중들과 더욱 친숙해질 것이다. 예술과 대중이 친숙하게 만나는 마당에서 예술문화는 나날이 무르익지 않을까. 아무나 예술가가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예술교육을 받아야 한다. 나이와 조건에 맞는 다양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이 학교와 생활에 녹아들어야 한다.

문화예술이 활발한 지역은 경제활동도 원활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문화예술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으며 다양한 경제적 생산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제안을 하고 싶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한 달에 한 번씩 전시장이나 공연을 보고 감상문을 제출한 학생은 생활기록부에 기재하고 가산점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 너무 과도한 욕심일까. 문화를 즐기는 학생들이 더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풍부한 감성을 지니며, 봉사 학점을 받는 행사에도 스스로 즐겁게 참여할 것이다. 미적 인간학을 바탕으로 자라난 아이들이 어른이 돼 만드는 세상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되지 않을까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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