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터
빈터
  • 울산신문
  • 2019.12.12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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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자 수필가

오랜만에 어머니와 외가를 찾았다. 교통이 편리해져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곳인데도 외조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찾을 기회가 없었다.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첩첩 산골짜기는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 군데군데 도심의 손길로 회색빛 공장들이 이방인처럼 서 있어 낯설기만 하다. 그림 같았던 마을은 떠밀려온 도시의 파편들로 인해 몰라보게 변해간다. 

썰매를 타고 놀던 개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주차장으로 단장되었고, 상여가 있던 움막 자리에는 마을회관이 들어섰다. 그 뒤편으로 돌담을 쌓고 있던 외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휑하니 빈터만 남았다. 빈 땅은 누군가가 채소밭으로 이용하고 있는 듯했으나 이른 봄이라 생명이라곤 눈에 띄지 않는다. 

볕이 잘 드는 안채에는 할아버지가 계셨고, 건너편에는 우리가 묵었던 사랑채가 있었다. 사랑채를 돌아가면 가마니로 반쯤 가려놓은 뒷간이 나왔다. 밤이면 산짐승이 상엿집까지 내려와서 우는 것 같아 화장실 가는 일은 죽기보다 무서웠다. 외양간 옆에는 닭장과 토끼장이 놓였고 저만치에는 제법 큰 고욤나무도 자랐다. 그리운 풍경은 하나도 지워지지 않고 가슴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빈터에는 바람만 인다. 

한참을 멍하니 섰던 어머니가 마치 할아버지가 곁에 계신 듯 허공에다 말을 던진다. 

"아부지요 우리가 왔심더" 

어머니에 의하면 할아버지 생전에 말씀하시기를 "죽어도 여기 있지 딴 데 안 간다, 내가 없어도 여기 있거니 하고 지내라"고 했다는 것이다. 막상 그 말을 들으니 외할아버지의 혼령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아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비록 외손이지만 핏줄이라곤 지구상에 오직 우리 가족뿐이지 않은가. 흔쾌히 반겨 줄 것만 같다.

유년 시절, 외할아버지의 존재는 우리에게 한줄기 생명의 빗물이었다. 무남독녀인 어머니는 친정을 의지하면서 어렵게 우리를 키웠다. 철철이 양식은 물론이고 토끼나 병아리 같은 날짐승들도 시시때때로 얻어다 날랐다. 가족들 먹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친정에 손을 내미는 일에 익숙한 어머니였다. 

일용할 양식만 도움받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 형제가 살아가면서 터득해야 할 기본적인 것들을 외할아버지 손에 맡겼다. 외가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외할아버지는 자연에서 우리를 뛰어놀게 하고 밥상머리에서 예절을 익히게 했다. 텃밭에 씨앗을 심고 때를 기다렸다 수확하는 기쁨을 누리게 도왔다. 긴긴 겨울밤에는 화롯불 앞에다 교자상을 펴놓고 한자를 가르쳤다. 공부에 취미가 없던 나와 동생은 그 시간만 되면 코를 박고 졸았다.

할아버지의 손에는 언제나 사탕과 회초리가 들려있었다. 잘못한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야단치지는 않았다. 저녁상을 물리고 잊을만하면 반드시 그날의 잘못을 반성토록 했다. 자상하면서도 엄할 땐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호되게 나무랐다. 어린 나이에 엄마 아버지와 떨어져 지냈으니 서러운 마음에 베갯잇을 적시는 날이 많았다. 

외할아버지는 우리를 세상이라는 자갈밭에 온전히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비가 되고 햇살이 되어준 분이다. 자나 깨나 어린 외손들을 애처롭게 여기며 야물게 커가길 보살펴 주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가가 남의 손에 넘어간 뒤로 까맣게 발길을 끊고 지냈다. 

불쑥 찾은 외가는 세월의 물살에 모든 것이 쓸려가고 빈 땅에 쓸쓸함과 적막만이 남아 있다. 잊고 지냈다기보다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 온 안태 고향 같은 외가가 아닌가. 추억에 잠길수록 할아버지의 고마움이 새삼 가슴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막걸리 한 잔에 그리움을 채우고 있자니 햇살 한 줌이 따습게 내린다. 머잖아 빈터에는 우리가 여기서 무처럼 자랐듯이 콩씨든 호박씨든 파릇하게 돋아날 것이다.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추억 외에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이지 않은가. 술잔을 잡고 세월의 염주 알을 굴린다 해도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다. 할아버지가 떠난 빈터에는 봄도 아닌데 그리움의 싹이 우후죽순으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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