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벌등안(捨筏登岸) - 버려야 이길 수 있는 법
사벌등안(捨筏登岸) - 버려야 이길 수 있는 법
  • 울산신문
  • 승인 2019.12.19 21:20
  • 기사입력 2019.12.1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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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의 사자독해]

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올해의 시자성어로 전전반측(輾轉反側)이 선정됐다는 보도다. 청년층의 불안한 삶을 반영한 사자성어라고 주석을 달았지만, 사실 이 말은 출처가 오묘하다. 전전반측의 원전은 시경(詩經)이다. 시경 국풍(國風)의 관관저구(關關雎鳩)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구룩구룩 물수리는 강가 섬에 있고(關關雎鳩 在河之洲)/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구나(窈窕淑女 君子好逑)/들쭉날쭉한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치며(參差荇菜 左右流之)요조숙녀를 자나 깨나 찾아보네(窈窕淑女 寤寐求之)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니 언제나 생각만 가득하고(求之不得 寤寐思服)머리에 맴도니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하네(悠哉悠哉 輾轉反側). 

아리따운 여인에 마음이 뺏긴 사내가 눈앞에 어리는 여인의 잔상에 잠 못 드는 마음을 표현한 네 글자가 전전반측이다. 순정파 같은 시의 분위기와 달리 전전반측은 수천 년을 뛰어넘어 불안한 세태로 변신했다. 

세밑은 원래 어수선하다. 하지만 올해 세밑은 유난히 산만해 보인다. 북핵문제가 원점회귀 국면으로 치닫고 한일관계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국내 정세는 더 혼란스럽다. 조국사태로 이어진 청와대발 문고리 논란이 유재수 감찰 봐주기로 이어지다 급기야 울산시장 선거 하명수사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여기에다 예산안 날치기 처리에 패트 3법 직진강행 국면으로 국회는 연일 농성장이다. 

어수선한 시국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자는 김정은이다. 김정은은 영리하다. 지혜롭지는 못하지만 머리는 빠른 자다. 이른바 잔머리의 끝판왕이다. 트럼프와 벌인 1년여 동안의 샅바 싸움은 현재까지 김정은의 판정승으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트럼프는 연일 트위터를 통해 설익은 은유로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있다. 대부분이 꼼짝 마라, 가만두지 않겠다는 수준이다. 하지만 김정은은 속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심복들이 순차적으로 트럼프를 들었다 놓았다 하고 툭하면 쏴지를 태세다. 세밑이 가까워지면서 비핵화 협상의 마지노선인 연말이 시한폭탄처럼 째깍거리지만 김정은은 백두산에서 모닥불을 한번 쬐고는 입을 다물었다. 체제의 명운을 건 비핵화 협상 시한 종료를 앞두고 최대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한 채 '새로운 길'을 준비하고 있다는 관측이 우세하지만 이런 전망도 북한 때문에 먹고사는 이들의 추측일 뿐, 여전히 김정은의 복심은 미공개 버전이다. 북한이 정말 '크리스마스 선물'을 쏴댈지는 알 수 없지만 트럼프가 약발 다한 스프레이로 그어둔 레드라인의 경계에서 김정은의 줄타기는 아슬아슬해 보인다. 

동북아의 긴장 상태가 연일 상한가로 치솟지만 우리 정치는 여전히 밥그릇 싸움에 한창이다. 정의를 외치고 적폐를 외치고 미래와 혁신을 노래 부르지만 까놓고 말하면 모두가 제 밥그릇 챙기기에 불과하다. 국회 수장이라는 자는 아들에게 지역구를 물려주려는 꿍꿍이를 안주머니에 감춘 채 혈압을 올리니 툭하면 응급실행이다. 4+1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연맹은 삼한 초기 부족끼리 땅따먹기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여기에 야당의 행태는 어떤가. 곡기를 끊고 결사항전을 외치다 링거로 부활한 황교안 대표는 장소를 옮겨 가부좌를 틀었다. 이번엔 나를 밟고 가란다. 정말 밟고 가면 어찌할 것인지 대안은 삿대질뿐이다.

지난 주말 영국 총선에서 온갖 비난에 너덜이가 된 집권 보수당이 압승했다. 보수당은 364석으로 203석을 얻은 제1 야당 노동당을 161석 차로 눌렀다. 이전 의석에서 보수당은 66석을 늘렸고, 야당인 노동당은 40석이 줄었다. 인기가 바닥을 친 보수당이 예상보다 큰 차로 승리한 결정적 요인은 무엇보다 야당 복을 타고났다는 분석이다. 딱 우리 정치와 평행이론이다. 영국은 존슨 총리를 둘러싼 온갖 악재가 터졌고 브렉시트 문제로 온 나라가 휘청거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야당인 노동당은 대안 세력으로서 어떤 길도 제시하지 못해 결국 유권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무엇보다 유권자들은 야당인 노동당에 대한 실망감이 야당 패싱으로 이어졌다.  집권당의 실책에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할 노동당은 오히려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 일관해 당론도 정하지 못한 채 목청만 높이다 닭 쫓던 개가 됐다. 

다시 광화문으로 나간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4+1'의 예산안 및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공조를 거론하며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자 했다. 반드시 끝장을 내겠다"고 밝혔다. 그는 "선거법과 공수처법 등은 독재 완성을 위한 양대 악법"이라며 "행정부와 사법부가 장악됐고, 이제 입법부 하나 남았다. 다 무너지면 삼권 분립이 무너지는 것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단식에 이어 무기한 농성에 명분을 얻겠다는 외침이다. 

하지만 여론은 여전히 차갑다. 야당의 주특기인 밀실야합을 여당이 돼서도 그대로 써먹는 민주당도 민망하긴 오십보백보지만 황교안 식 끝장정치는 타협의 공간이 없다. 전형적인 공직캐릭터다. 원칙대로 한다는 그의 소신이 공안검사 시절에는 상명하복으로 흐름을 탔겠지만 지금은 정치판이다. 정치는 맞짱뜨는 싸움판이 아니다. 문제는 그에게 협상과 타협의 유전인자가 없다는 점이다.   

황교안이 누구인가. 박근혜 탄핵 당시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뤄질 때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한 국가의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물론 탄핵국면에 권한대행의 역할이 뭐 그리 대단하겠냐고 폄하하는 이도 있지만 사람에 따라 앉아 있는 자리는 접이식 의자도 되고 옥좌로도 변할 수 있다. 탄핵과 국정농단 수사가 이어질 때 그는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투쟁의 동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사정 때문에 자유한국당이 새 지도부를 구성할 때 황교안 체제의 한계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왜 한국당은 황교안을 보수 부활의 최선전에 세웠을까.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으뜸은 여론이었다. 한때 이낙연 국무총리를 앞서는 지지율로 대선주자 1위에 링크되는 걸개가 광화문에 걸리자 한국당은 흥분했다. 이제 때가 왔다. 숨죽인 샤이 보수들이 아랫목 이불을 걷어차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싶었다. 홍준표가 그랬고 황교안이 그랬다. 여론조사 정상권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그가 바로 보수부활의 역사적 사명을 움켜쥐어 줄 것으로 착각했다. 

아뿔싸, 홍준표가 그랬듯 지금 이 시점에 샤이 보수는 없다. 지금 퇴근길 뒷골목에서 지나간 옛사랑의 그림자를 추억하는 보수들은 술잔만 기울이면 샤이보수를 이야기한다. 숨어 있는 보수들이 이 겨울이 지나고 4월이 오면 벚꽃처럼 꽃잎을 벌리고 보수의 재건을 환하게 밝힐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샤이보수는 없다. 어쩌면 샤이보수가 아니라 사이사이에 가끔 보수를 추억하는 이들은 있을지 모르지만 부활할 정도의 보수는 이미 오래전에 궤멸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현재의 정치는 보수와 진보라는 프레임이 무너졌다고 이야기한다. 기득권을 버리지 못하는 보수와 절대우월주의에 빠져 내로남불을 모의하는 진보는 이제 우리 정치에 설 자리가 없다. 

여의도엔 지금 염치가 실종된 직업 정치인들이 습관처럼 배운 도둑질에 날밤 새는 줄 모르고 서로 삿대질만 하고 있다. 내가 더 도덕적이고 내가 더 정의롭다고 목청만 높이는 형국이다. 국회가 밥그릇 싸움의 최전선으로 변한 상황에서 국민들은 더 이상 정치에 희망을 갖지 않는다. 야당 복이 많아 재집권에 성공한 영국의 보수당처럼 우리 정치도 야당복 덕분에 선거법도 바꾸고 공수처도 만들어 20년, 아니 영구집권의 나팔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가능성이 높다. 이 장면에서 자유한국당의 길은 하나뿐이다. 언덕에 오르면 뗏목을 던져 버리라고 싯다르타는 꾸짖었다. 사벌등안(捨筏登岸)이다. 총선을 100여일 앞둔 바로 이 시점이 뗏목을 버릴 타이밍이다. 버리지 않으면 머지않아 뗏목과 함께 지쳐 쓰러질 장면이 너무나 뻔하기에 들려주는 이야기다. 뗏목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화장실에 앉아 조용히 결단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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