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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의 계절이 왔다. 세밑이라 불리는 이때쯤이면 은행이나 약국 같은 데서 달력을 마련해두고 손님들에게 가져가게 하는데, 나도 단골 약국에서 달력을 하나 얻어가지고 왔다. 이제 이 달력 하나로 한해의 대소사와 모든 약속이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다. 동그라미, 세모, 혹은 별 모양으로. 한 장 남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건 뒤 그 위에 다시 가벼워진 올해 달력을 건다. 새 달력은 세상에 선보이기 전의 갓난아기처럼 잠시 포대기에 싸여 있는 것 같다. 시간의 추가 기우뚱, 아래로 기운다.

어렸을 때는 달력이 아주 귀했다. 처음 본 건 일 년이 한꺼번에 나오는 한 장짜리 달력인데, 달력이 나오면 동장은 의기양양하게 식전 댓바람부터 사립문 밖에서 우리를 불러댔다. 위에는 국회의원 사진이 있고 밑에 날짜가 인쇄된 이 달력은 주로 안방의 사진틀 밑, 그러니까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두었다. 한해 내내 붙어있다 보니 나중엔 때가 끼고 찢어져서 연말이 되면 새 달력이 나오길 목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다.

한 장씩 뜯어 쓰는 일력도 있었다. 일력은 뜯을 때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고 날이 간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시계로 치면 부지런히 움직이는 초침인 셈이다. 두툼하던 일력이 얇아지면 우리는 그만큼 키가 자라 소맷단이나 바짓단이 짧아져서 한 해가 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장의 일력이 남았을 때, 평소처럼 확 뜯어버리던 손을 잠시 멈추고 마지막 숫자를 눈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좀 더 오래 이 시간에 머물고 싶은지 빨리 새해를 맞이하고 싶은지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한국의 십이경이나 세계의 명화, 여배우들 사진 등이 실린 멋진 달력도 있었다. 탁상용 달력도 선물로 받곤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흔하고 편하게 쓸 수 있었던 것은 큼직한 숫자 밑에 음력이 표시된 달력이다. 세밑이 되면 아버지는 농약사나 종묘사에서 받아온 달력 두어 개를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술이 얼큰해져서 돌아오곤 하셨다. 그 달력을 동장이 자못 거드름을 피우며 나누어주던 벽보달력 자리에 걸고 호기롭게 첫 장을 뜯어내셨다. 그리고 찬찬히 달력을 들여다보다 이내 침울해지곤 하셨는데, 아마 음력 1월 1일을 확인하고 제때 옷을 사주지 못해 껑충한 바지를 입은 우리를 보고 설빔을 어찌 마련할까 궁리하시느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엔 달력이 책의 형태로 만들어져 책력이라고 하였다. 책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농사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일로, 이십사절기는 물론 기상의 변화를 예측해서 적어두었다. 하늘과 자연의 뜻을 전달하는 창구의 역할을 한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도 책력을 떠오르게 하는, 숫자만 큼직하게 적힌 수수한 달력이 좋다. 

음력이 나오고, 십이간지 동물이 그려져 있고, 입춘이니 우수니 하는 절기가 인쇄된, 오로지 달력의 기능에만 충실한 달력. 생일과 제사와 결혼식과 마감일을 기억하게 하는 달력. 날마다 새로우면서도 가장 오래 전의 모습을 보이는 저 표식들. 

요즘엔 스마트폰 앱에 달력 기능이 있고 일정을 기록할 수 있어서 달력의 수요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아이들 방에 걸어준 달력도 한해 내내 일월이다. 하지만 세밑의 어떤 허전함, 쓸쓸함, 한 해가 가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미묘한 한기, 이런 것들은 한 장 남은 종이 달력이 아니면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돌돌 만 새 달력을 들고 어두워져 가는 도심을 걸을 때, 거리엔 어느새 캐롤이 흐르고 나무 위에 연처럼 걸린 전구들이 반짝거릴 때, 젊은이들의 맑은 웃음이 귓가를 스칠 때, 우리는 집으로 가는 발길을 재촉하다가도 빛 속에서 종종 길을 잃는 날벌레처럼 회한과 기대 속에 문득 걸음을 멈추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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