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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울산을 알리는 뉴스들이 많았다. 태화강국가정원 지정부터 한국관광의 별 선정까지 울산이 관광도시로 새롭게 부각된 한해였다. 울산에 살면서 새롭게 발견하는 것들 가운데 놀라운 것이 많다. 비단 우리 주변의 역사 문화적 유적만이 아니라 잊혀진 이야기들도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울산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던 이들이 울산으로 발령받아 1년 남짓 살다 떠나게 되면 대부분이 울산예찬론자가 된다. 공직에 몸담은 이나 공장장으로 머물다 간 이들의 공통점이 그렇다. 최근에 울산을 떠난 한 인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서울 토박이로 50년 넘는 삶을 수도권에서만 생활했다. 그런 그가 울산에 발령을 받은 것은 지난 2017년 겨울이었다. 만 2년 동안 울산에 살다가 떠나는 그는 떠나기 전 어느 날 저녁, 진심 어린 눈빛으로 울산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이 이야기를 잠시 옮겨본다.

"정말 잘 몰랐습니다. 울산에 발령이 나자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공해공장이 많은 곳이니 조심해라. 유흥업소는 강남 뺨친다니 좋겠다…등등의 이야기들이 쏟아졌습니다. 평소 직장 안에서 울산하면 떠돌던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말들은 잘못된 정보였습니다. 울산에 와서 주말마다 밟고 다닌 울산의 땅과 마신 공기, 손발로 적신 물과 사물은 신비롭고 청량했고 신선했습니다. 울산은 공해도시가 아니라 한반도 인류의 뿌리와 신라 천년의 배후 도시로 자리한 엄청난 역사문화의 도시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담아낼 수는 없지만 그는 거의 한 시간 남짓한 식사자리에서 대부분을 2년간의 울산 체험기와 회고로 이어갔다. 그랬다. 울산은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져 있다. 자료가 없으니 증명할 길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살아보니 곳곳에서 울산의 원형을 발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반구대암각화이고 선사문화 1번지인 대곡천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울산은 동쪽 무룡산부터 서쪽 문수산까지 한반도의 광활한 산자락이 동해로 뻗어가는 종착지다. 그 산세에 굽이친 다섯 자락의 강이 동해를 향해 내달리는 모습은 가히 비경이다. 경치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학적으로 울산은 원시시대부터 온갖 식생의 보고가 될 자산을 갖춘 셈이다. 

그 흔적이 공룡발자국과 고래유적, 학(鶴)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설화와 바위그림 등으로 남아 이 땅이 예사로운 곳이 아니라고 웅변하고 있다. 실제로 울산은 오래전부터 학이라는 신성시된 새의 영역이었다. 학성부터 무학산, 회학, 회남, 학남리, 무학들, 비학 등 학과 관련한 지명이 무수하다. 아마도 오래전 울산은 태화강, 동천강, 여천강, 회야강, 외황강이 동해로 흘러가며 늪지가 발달해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학이 삶의 터전을 잡았는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그 많던 학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다. 물론 오랜 학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온전한 우리 학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연어가 돌아오고 태화강 하류에 바지락이 살아나고 있지만 학은 무소식이다. 바로 그 학을 새롭게 주목하고 울산의 대표 브랜드로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여전히 울산의 리더들은 소극적이다. 

울산 하면 고래를 빼고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울산과 고래는 오래된 공동체다. 태화강이 생태복원의 교과서가 되고 반구대암각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달라지면서 울산은 동해로 나가는 한반도의 기상이 옹골차게 서린 오래된 역사성의 도시라는 명성을 되찾아 가고 있다. 그 오래된 역사를 복원하는 노력은 바로 울산시민들의 몫이었고 그 노력의 결과가 울산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시대적, 아니 역사적 소명이 됐다.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 울산의 역사와 문화 유전인자는 바다다. 산과 강, 온 산하에 서린 역사와 문화의 흔적은 울산의 보물창고와 같은 것이지만 그 기운이 고스란히 내려앉아 질퍽하게 펼쳐진 동해는 이 땅에 퍼질러 앉아 대대손손 삶을 가꾼 선조들의 꿈이었다. 산자락 휘감아 등짐에 지고 태화강 백리 길을 굽이돌아 달려간 바람이 망망한 동해 앞에 숨이 멎는 순간을 대면하지 않은 사람들은 바다를 모른다. 바로 그 바다의 심장이 고래다.

반구대암각화에 가죽배가 새겨져 있고 그 배를 타고 7,000년 전 사람들이 고래사냥으로 삶을 이어온 증좌가 있지만 정작 울산에는 이제 고래가 없다. 배를 타고 동해로 나가면 가끔 만날 수 있는 고래와 고래생태체험관에서 동물 학대의 상징이 된 채 불편하게 만나는 고래가 있을 뿐이다. 울산에서 바로 그 불편한 문제를 애써 끌어안고 짊어지고 가는 이유는 울산의 정체성 때문이다. 울산은 인류 최초의 고래사냥터였고, 그 문화가 제의와 발복, 회화와 문자의 기원으로 우뚝 서 세계인의 자랑이 되기 때문이다. 왜 반구대암각화를 보존해야 하고 고래생태관에서 태어난 고래를 모든 노력을 기울여 생육하고 보호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울산의 오늘은 산업수도지만 뿌리는 바다와 고래였고, 그 심장소리가 아직도 뛰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반구대암각화 만큼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 바로 울산 남구 황성동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이곳은 지난 2010년 울산 신항만 조성 공사 중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석기시대 한반도 연근해의 고래잡이 역사를 증명해주는 '골촉 박힌 고래뼈'가 발굴되자 학계는 흥분했다.  유적에서 발견된 고래뼈와 화살촉에서 고래뼈는 견갑골, 화살촉은 사슴 등 동물의 뼈로 만든 것으로 추정됐다. 선사시대 바위그림인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와 고래잡이 모습이 나타나 있지만, 당시 포경 사실을 입증하는 실물자료는 이 유물이 처음이었다. 

사라져간 고래문화를 왜 부여잡고 복원하고 보존해야 하는가는 울산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자긍심과 함께 하는 문제다. 사라졌으니 복원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부족하다. 문제는 미래를 위한 투자다. 과거의 흔적을 미래의 먹거리로 만들어가려는 작업이 투자의 근거가 된다. 세계의 수많은 도시들이 미래 먹거리를 과거의 문화에서 찾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래전 필자가 일상과 잠시 결별하고 미국 등지를 돌아다닐 때 라스베이거스에서 태양의 서커스와 만났다.

트레저 아일랜드 호텔에서 공연한 서커스단의 '미스테르(Mystere)'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그 공연을 본 이후 태양의 서커스라는 곳에 호기심이 생겼다. 태양의 서커스는 1984년 캐나다의 낙후된 탄광촌 퀘벡에서 시작됐다. 불과 두 해 전인 1982년 '베생폴 거리축제'에서 인기를 끌었던 길거리극단 단원 10여 명이 사라져 가는 서커스의 부활을 모의했다. 옛것을 그대로 복원해서는 미래가 없다고 본 그들은 서커스에 컴퓨터그래픽(CG)과 특수효과를 입혔다. 그리고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공연의 전체 맥락을 이야기로 덧씌웠다. 한물갔다고 평가받던 서커스가 세계적인 문화상품이 됐다. 

축구로 유명한 영국의 리버풀은 도시의 문화브랜드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지난 1990년대 후반 비틀스와 축구의 도시였던 리버풀은 제조업 중심 성장이 한계에 달하며 저성장과 실업으로 골머리를 앓던 항구도시였다. 그 당시 리버풀을 변화시킨 동력은 바로 리버풀 만이 가진 역사성의 회복이었다. 설탕과 담배 등 무역품들을 보관했던 앨버트 독의 거대한 창고건물에는 세계적인 미술관인 테이트 리버풀을 비롯해 비틀스 스토리, 해양박물관과 국제노예박물관 등으로 탈바꿈했다. 그 후 유네스코는 2004년 항구 주변지역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고 2008년에는 '유럽의 문화수도'로 발전했다. 

대한민국 근대화의 기수로 과거의 역사와 생태 환경을 헌납한 울산은 이제 과거를 복원해야 하는 숙명과 마주하고 있다. 올해 필자가 근무하는 울산신문사가 가장 주목할 만한 사업을 한 것이 바로 울산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조명해보려는 노력이었다. 그 구체적인 사업이 남구와 함께한 남구 바로 알기 프로그램이었다. 울산 남구는 고래문화의 뿌리이자 신라 천년의 배후 항만과 대한민국 근대화의 심장이 펄떡거리는 지역이다. 바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사는 땅이 어떤 역사를 가진 곳인지를 제대로 알리고 살려가는 일은 의미 있다. 남구는 이 사업을 계기로 개운포와 처용암, 그리고 장생포로 이어지는 울산의 오래된 미래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에 팔을 걷었다. 어둠 속에 던져진 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구슬을 찾아 빛을 발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그냥 던져 놓으면 어둠에 묻혀 있을 뿐이다. 바로 명주암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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