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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조선 후기 인천 부둣가엔 초선이란 기녀가 살았는데 유달리 담바고 즉 담배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기방에선 담배를 '초선이 기둥서방'이라 애칭하기도 했다. 그래 그런지 기방과 연관된 낭만적인 옛이야기엔 담배가 빠지지 않는다. 이후 일제 강점기 1931년에 나온 염상섭의 장편소설 '삼대'를 위시한 여러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사랑채와 대문채의 머슴방 묘사에도 담배는 단골로 나오곤 한다. 이와 같은 저간의 친밀도 때문에 그 심각한 폐해가 널리 알려진 요즘까지도 기성세대의 상당수는 여전히 흡연에 매우 너그럽다.

그런데 그 담배의 폐해를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살피면 아연실색 심각하다. 다음백과 등 몇몇 자료를 참고해 보면, 담배 한 개비에는 무려 4,000여 종의 화학물질, 10만 종 이상의 알려지지 않은 물질이 들었다. 국제암연구소에 따르면 담배에는 나프탈렌, 니코틴, 타르, 방사선 물질 포로늄210, 비소, 싸이나, 벤조피렌, 일산화탄소, 카드뮴, 페놀, 청산가스 등 69종이나 있다. 이들 중 담배 30갑을 피울 때 나오는 청산가스를 모아 체중 70㎏ 정상인에게 한 번에 투여하면 절반이 사망한다. 니코틴의 경우는 대마보다 중독성이 훨씬 강한 마약이다. 이런 니코틴 60㎎이 우리 체내에 들어오면 1분 이내에 사망하고 만다. 참으로 소름끼치게 무섭다.

'방 안의 코끼리'란 말이 있다. 모두가 잘못됐다는 걸 알지만 누구도 얘기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매사에 몸을 사린다는 점에서 '복지부동'과 이음동의어로 취급되기도 한다. 혹자는 더욱 어두운 시각으로 '똥파리'로 은유하기도 하지만 살기 위한 '시체놀이'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보편적이며 오래된 전통적 문제해결책이란 점에서 힐난만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오늘날과 같이 빠르고 복잡다기한 현실을 살아가는 민주시민사회의 주체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다 적극적 능동적 태도를 지녀야 생존할 수 있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혹은 '긁어 부스럼'이나 '경거망동'과 같은, 과거의 보신주의 아래 형성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식의 태도를 가장 경계한다. 아니 두렵다. 그것은 모든 것들에 앞서 오로지 생존만을 1순위 가치로 둔, 삶과 죽음 둘 중 딱 하나뿐인 행동양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책임회피에만 급급한 모습일 뿐, 새로움이나 내일을 향한 그 어떤 선의의 시도나 욕망 혹은 변화의 꾀함도 일체 불허하며, 혹 실행에 최선으로 진력하며 노력한 경우에도 실패하면 그 순간 곧장 비극적 죽음을 강요하는 흑백논리 시절의 무도함 때문이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며 언제나 국정에 부지런했던 여제 예카테리나Ⅱ세는 러시아 제국사에 단 두 명뿐인 대제다. 그 치세 기간(1762∼1796)은 러시아 제국의 '황금기'로 불렸다. 그런 여제의 초상화를 화가 보로비콥스키는 그저 수수한 평상복 차림으로 그려 더욱 유명해졌는데, 언제부턴가 필자는 그 예카테리나Ⅱ세 초상화를 가끔 볼 때마다 보로비콥스키의 평범함 속의 비범함을 발견하는 시선에 재차 탄복하며 여제의 말을 떠올리곤 한다. 최고의 절대 권력이었던 그녀가 문제 상황에 봉착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되뇌던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를. 그렇다.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라서 실수할 수 있다. 그래서 재생이나 회복, 재도전이나 다시 한 번 더 노력을 쏟아 붓고 저 여제처럼 최선을 다할 기회가 있어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원래 의도한 플랜A가 성공한다고 보장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실패하면 그것을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꼼꼼히 따지고 분석해서 플랜 B를 준비하고, 또 실패하면 플랜C, D, E… 성과를 볼 때가지 계속 수정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목표에 근접해 있는 것이다. 

'검은 백조(Black Swan)'란 말이 있다. 검은 백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검은 백조가 나타난다면, 기존 상식은 충격적으로 깨어진다. 즉 검은 백조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남을 일컫는다. 17세기에 실제로 호주에 살고 있는 흑조를 발견함으로써 생긴 개념이다. 

이를 미국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가 처음으로 앞서의 '방 안의 코끼리'와 합성시킨 게 '방 안의 검은 코끼리'다. 이미 방 안의 코끼리처럼 눈앞에 문제가 뻔히 닥쳤는데도 검은 백조처럼 존재하지 않는 듯이 무시하다가 더욱 크게 당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여러 요소의 결합물이겠지만 가장 주된 원인은 시민들의 무관심이나 회피다.

초딩 말법을 잠시 빌린다. 빵은 빵인데 빵 중에서 가장 호불호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빵은? 길거리 흡연의 신조어 길빵이다. 이 길빵의 적나라한 현실태는 길빵을 즐기는 흡연자들에게는 그저 황홀함일 테지만 길거리에서 몸과 마음 모두를 한순간 무차별 난자당하는 비흡연자들에겐 그냥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말 슬프고 괴로운 것은 이것이 이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넘어서 '방안의 검은 코끼리'로 공고하게 터 잡았다는 사실이다. 즉 그 많은 피해자들의 그 어떤 저항의 목소리나 몸짓을 듣지도 보지도 못해 더 절망스럽다. 

필자는 우리 사회가 법질서와 도덕적 규범이 비교적 공고하다고 믿었는데, 이 길빵에 있어서는 예외인 것 같다. 더구나 밤이면 일부 후미진 정류장이나 구석진 곳은 먹다 내버린 음료수 용기에다 길빵까지 난무하는 그야말로 무법천지 아노미(Anomie) 상태를 자주 목격한다. 곧 새해다. 늘 역동적인 우리사회라서 '방 안의 검은 코끼리'가 여전히 많겠지만, 국민 모두의 건강과 직결되는 '길빵'만큼은 플랜A, B, C를 다해 해결의 실마리를 꼭 찾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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