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월
  • 울산신문
  • 2020.01.0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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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성제 수필가

매서운 바람이 우는 사자 같다. 기온이 올겨울 정점(頂點)을 찍을 기세다. 동해로 1월 마중을 나가는 새벽, 가로수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고 있다. 세상의 생물체 가운데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건 나무라고 한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중력을 거슬러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자신을 온전히 비워냈다. 겹겹이 껴입었던 잎들을 훌훌 벗어던졌다. 앙상한 옹이마저 드러낸 모습이 정직해 보인다. 

벌레 먹은 몸으로 꽃도 피웠고 열매도 거두었다. 그것을 그저 숙명과 소명으로 여기며 받아들이고 이루어냈다. 지난 일들을 자랑하거나 낙심하지 않는 나목에게서 충분한 겸허를 배운다. 뿐만 아니라 빈 나뭇가지에 지존과 위엄이 서려있다. 할큄과 쓰러뜨림의 고충이 있었을지라도 끝까지 견디며 버티는 자만이 또 다시 생명을 품을 수 있음을 나무는 잘 안다.

때를 기다려야 한다. 한 해가 시작되었다고 섣불리 꽃을 피우는 즉시 끝이다. 아직은 말 그대로 겨울이다. 이상기후로 인해 힘이 없어졌다 해서 호락호락하고 만만한 계절이 아니다. 머잖아 만나게 될 꽃과 열매를 위하여 꿋꿋해야 할 나무들에게 1월이 당도했다. 1월은 꿈꾸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앞으로 이겨내야 할 일에 대한 담대함까지 두둑하게 얹어준다. 

1월은 자체 서두름이 없다. 느긋하다. 성급함을 애초 타고나지 않았다. 급박한 오늘날에 어울리지 않게 첫발을 떼는 1월에겐 늘 시작이라는 단서가 붙어있다.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각오를 세우는가하면 또 다른 시작을 계획한다. 첫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한발 한발 내딛을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운다. 

지난해는 결산되었다. 아직 끝내지 못한 계산이 있다면 1월은 자신을 내어주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자신을 조금 내어 준다고 해서 뒤따라오는 달(月)이 삐걱거리지 않는다. 이 정도 시간의 씀씀이는 남은 열한 달을 위해 충분히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다. 어쩌면 1월은 1년의 나머지 날들을 제대로 살리기 위한 희생양의 운명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속살을 만나기 위해 벗겨내는 껍질 같은 달일지도 모른다. 그토록 고대하던 희망이 불현 듯이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하니 그저 맨 앞에 섰다는 것이 서럽기만 할 때도 있다. 

1월은 저 먼 바다, 깊은 바다에서 수평선 위로 배밀이를 하며 떠오르는 태양이다. 그러다 수평선에 머리꼭대기가 닿으면 순식간에 용솟음치는 힘을 지녔다. 시위에 걸린 화살처럼 세상의 과녁을 향해 달려가는 빛이 된다. 과녁을 뚫을 기세로 거침없이 날아간다. 달려갈 힘은 어둡고 추운 바다 깊은 곳에서 비축되어 왔다. 설령 과녁을 벗어난다하더라도 낙심하지 않는다. 희망의 꽁무니에 붙어 따라다니며 여차하면 고개를 디밀어내고자 하는 낙심 따위는 사실 힘이 없다. 잘못 고개를 내밀었다가는 옴쭉 못하게 밟힐까봐 두려워 늘 눈치를 보는 절망에게 1월은 희망을 품은 장수의 첫 화살처럼 날아가 쏜다. 

해마다 만나는 1월이지만, 객지로 나간 자식이 다니러 올 때처럼 입 꼬리가 벙싯거린다. 그 얼굴을 실컷 바라보며 앞일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새우듯 다시 돌아온 1월과 마주보며 이야기하고 싶다. 묵은 밥 식은 밥을 뒤로 물리고 갖은 영양이 섞인 새 밥을 지어 먹이고 싶다. 그동안 생각 없이 막 먹어왔던 패스트푸드나 정크푸드는 더 이상 곁들이고 싶지 않다. 갓 지은 새 밥에 새 숟가락을 얹어주고 싶다. 언제나 '시작'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1월은 그야말로 희망이니까. 

뿌연 나침반도 닦고 신발 끈도 다시 조인다. 기지(旣知)와 미지(未知)의 길을 간다할지라도 힘차고 당당하게 발을 뗄 수 있도록 새해 첫새벽에 동해 일출 앞에 선다. 온몸을 번들번들 검은 패딩으로 둘러싼 돌고래 떼가 붉게 떠오르는 1월을 향해 힘차게 환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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