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무지에로의 접근

                                                                                                                                    송재학

만약 이 땅에 이 나라 넓이만한 황무지가 있다면
언제까지 걷다가,
걷다가 어느새 모래 흘러가는 강이 준비한 배를 보리라
모래 같은 책의 첫 페이지가 기다리리라
낯선 모래 서가 뒤에는
바람 때문에 짐작할 만한 목마름이 맨 처음
바람 때문에 책은 운명을 급하게 이야기한다
사실 황무지는 장삼이사의 내면이면서
책의 속살인 것, 그 연약함이여
황무지가 폐허가 아니라 심연이라고 믿는다면
신기루야말로 책의 저자들
지평선까지의 거리인
뒤표지의 기다림을 생각한다면
혼자 있기 위해 필요한 몽리면적을 생각한다면
내가 가진 사막은 자꾸 넓어져야 한다
선인장의 뾰족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는 앎은
각주가 많은 흉터이다
책갈피로 오래 사용한 모래 언덕 너머
뭉치고 흩어지는 구름의 판본에는
가둘 수 없는 정신의 배후인 의심이 있다
먼지투성이 의심들!

△송재학: 1986년 '세계의 문학' 등단. 시집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등. 산문집 '풍경의 비밀' '실크로드 삶과 꿈의 길' 등.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나에게 기억에 남는 여행을 묻는다면 다음을 말하겠다. 황량함을 보여 주겠다는 제안에 몹시 달뜬 적이 있다. 사정이 생겨 떠나지는 못했지만 그날 이후 나는 그 숲을 향해, 혹은 그 벌을 향해 걷고 또 걷는 중이다. '황량함'이라는 말만으로도 온몸 아득해지는 끌림이었는데 "황량함을 보여주겠다"라는 거대한 얼개는 엄청난 유혹이어서 순간 내가 모든 속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송재학 시인의 이 시와 시작노트를 자주 소리 내어 읽는다. 특히 새벽이 선물처럼 길게, 깊게 펼쳐지는 이 계절에는 시의 行을 걷어 나온 내 목소리를 만나는 일이 새롭고 즐겁다. 시인의 말처럼 황무지는 "폐허가 아니라 심연"일 것이며 "장삼이사의 내면"이면서 책의 연약한 속살인 것이다. 그래서 "황무지의 내면에 고인 것을 떠올리"며 "정신의 샘이 마를 때마다 나는 황무지를 횡단하리라"는 그의 말에 밑줄 그으며 동행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내가 찾아가는 황량함 또한 문명이 훼손한 황폐함과는 다른 어떤 근원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 시 속 황무지와 바람에 우리가 크게 매혹을 느끼는 것은, 그리고 내가 경험한 황량함이라는 말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속에 뜨겁게 내재된 원시성에로의 지향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 속으로 들어서는 일이다.
나는 오래 이 여행을 할 것 같다. "혼자 있기 위해 필요한 몽리면적을 생각한다면 내가 가진 사막은 자꾸 넓어져야" 하므로. 김감우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