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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줄

                                                                              길상호

거미줄을 엮을 때 거미는
첫줄을 바람에 맡긴다고 하네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그리하여 목숨까지 버티게 해주는

첫줄,

은빛 그물이
그 줄을 중심으로 엮어간다네

바람을 읽지 못하는 나의 시는
매일 던져도 가 닿지 못하는

거기,

오늘도 헝클어진 그물 안에
내가 잡혀들고 마네

△길상호 시인 : 충남 논산 출생.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모르는 척' '눈의 심장을 받았네' '우리의 죄는 야옹' 외 다수.


며칠 있으면 구정이다. 새해 첫 달은 스스로에게 늘상 속아오던 일이지만 그래도 새로이 다짐을 하곤 한다. 올해는 무슨무슨 책을 읽고 꼭 운동을 하리라. 하루에 한 편의 작품을 써보자. 아니다 너무 빡빡하다. 일주일에 한 편은 꼭 완성을 시키자. 그리고 흔들리는 어떤 날 하루쯤은 혼자서 어디든 훌훌 떠나보자! 그러나 전부 거짓부렁이 되고 한 달도 못돼 모조리 깨 박살나고 만다.


첫 입학, 첫 직장, 첫사랑, 처음 가보는 곳, 처음타보는 것, 처음 입어보는 것, 처음 신어보는 것, 처음 먹어보는 것, 그야말로 처음을 빼고 나면 일상이 밋밋할 정도로 처음이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첫 줄을 잘 타야만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다는 대학 입시와 직장이 있다. 거미가 믿고 맡기는 바람 같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줄이란 혈연, 학연, 지연을 동원해 경찰이나 의사, 검사, 하다못해 기자, 교수, 또는 국회의원도 명줄이 된다고 여긴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것이 줄의 계보학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시인 박정옥
시인 박정옥

미국 재무장관을 지냈고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계획을 세울 때 삶을 오직 직선형으로, 단계별로 올라가는 사다리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꿈으로 가는 길은 사다리가 아니라 경력과 경험들이 엮인 정글짐에 가깝다. 그러니 계획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라'


처음의 줄을 바람에 맡긴다는 거미는 놀랍도록 명쾌하다. 자신의 삶을 그냥 바람에 맡긴다니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거미의 낭만은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구나! 비가 오면 은구슬 매달고 휘영청 달밤에 벌레들을 유인한다. 그래서 은빛의 그물이 되어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구나! 바람 불면 몸을 실어 한 뎅이 실을 잣아 내는 거미. 그것은 삶의 중심을 읽어낼 줄 안다는데 있다. 계획 따윈 없다. 올해도 누군가는 여기 저기 거미망을 치러 바쁘게 돌아다닐 것이다.
 시인 박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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