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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 떼까마귀의 군무와 고구려 고분벽화의 삼족오(작은 사진)
태화강 떼까마귀의 군무와 고구려 고분벽화의 삼족오(작은 사진)

# 떼까마귀와 북방계 이주설
경기도 수원시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바로 떼까마귀 때문이다. 지난 2016년부터 찾아온 떼까마귀가 올해는 그 수를 더해 도심 곳곳에 서식지를 넓혀가고 있다고 한다. 떼까마귀는 울산에서는 겨울 진객으로 대접을 받지만 수원에서는 찬밥신세다. 수만 마리씩 몰려 다니는 떼까마귀는 수원시민들에게 흉물이 됐고 배설물 공포에 시청 민원전화가 폭주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수원에 떼까마귀가 출몰한 것은 불과 4년 전이다. 그전에는 김포 등지에서 발견되는 떼까마귀가 김포 신도시 등의 도시개발로 더 남쪽으로 내려와 수원에 정착한 것 아니냐는 진단을 하고 있다. 다른 전문가들은 수원인근인 화성지역 곡창지대가 떼까마귀의 먹이 창고로 자리해 먹이와 서식이 해결되는 수원 도심에 정착하게 됐다는 의견도 있다.

뜬금없이 수원의 도시민원을 왜 첫 문장부터 주절거리느냐 싶겠지만 떼까마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딱 10여년 전쯤 울산도 수원과 다르지 않았다. 삼호대숲을 중심으로 겨울철새 떼까마귀가 몰리자 남구 무거 삼호동 일대 주민들의 원성이 터져 나왔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새 떼의 공포감과 이들이 쏟아내는 어마어마한 배설물은 형언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 원성 속에서도 떼까마귀와 울산의 인연을 아는 이들은 묵묵히 배설물을 치웠다. 새박사 김성수 선생을 비롯한 울산의 오래된 미래를 가슴에 간직한 이들은 떼까마귀가 흉조가 아니라고 목이 터져라 이야기 하고 다녔다. 행정도 기발한 발상의 전환으로 주민들을 달랬다. 지붕을 태양광 패널로 바꾸자 떼까마귀가 신호를 읽었다. 친환경 생태마을로 거듭난 삼호동의 오늘은 그렇게 탄생했다.   

최근 울산시의 축제관련 뉴스가 자료로 나왔다. 울산시가 올해 울산의 대표축제를 쇠부리축제와 고래축제로 선정해 국비지원을 신청했다는 내용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시행하는 축제의 자생력을 강화하는 사업을 공모하고 있다. 바로 예비 문화관광 축제 지정 제도다. 예비 문화관광 축제에 지정되면 2년간 중앙부처 차원의 전문가 현장 평가, 빅데이터 분석, 컨설팅 등이 체계적으로 지원된다. 물론 재정적 지원은 필수다. 울산시가 쇠부리축제를 대표축제로 지정하는 것은 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가 울산이기 때문이다. 고래축제는 이제 대한민국 국민 상당수가 아는 것처럼 울산이 고래문화의 특허증을 가지고 있기에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시 떼까마귀로 돌아가 보자. 울산을 찾는 겨울철새인 까마귀는 떼까마귀, 갈까마귀 두 종류다. 이들은 몽고북부, 시베리아 동부 등에서 살다 매년 10월 말부터 이듬해 3월 말까지 남쪽으로 이동한다. 일부는 경기도에 머물지만 대부분의 떼까마귀는 울산 태화강부터 경주 형산강까지 겨울 한철 살림을 차린다. 겨울 진객 떼까마귀가 울산의 겨울 생태 랜드마크가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검정의 상징성 때문에 흉조로 여긴 잘못된 인식에다 배설물 공포로 시민들의 선입견을 바꾸는 데 어려움이 컸다. 까마귀를 흉조로 인식한 것은 조선조 선비문화의 영향과 일본의 오래된 까마귀 숭상문화의 영향이 있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까마귀는 한민족과 뿌리를 함께하는 우리의 새다. 실제로 까마귀는 조류 가운데 어른이 되면 늙은 어미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몇 안 되는 효성스러운 새로 알려져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태양을 숭배했던 우리민족이 태양과 인간을 연결하는 새로 '삼족오'(三足烏; 세 발 달린 까마귀)를 지목했다. 까마귀는 태양의 정기가 뭉쳐서 생긴 신비한 새로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점지하는 신성한 영물로 자리했다. 오래전 우리민족은 까마귀를 삼족오로 칭했다. 삼족오는 태양에 살면서 천상의 신들과 인간세계를 연결해주는 신성한 상상의 길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오(金烏), 흑오(黑烏), 적오(赤烏)라고도 부르며 신성시했다.

굳이 까마귀의 발을 세 개로 상징화한 것도 의미가 있다. 우리의 오래된 삼위일체 사상이 뿌리다. 천(天)·지(地)·인(人)을 바탕에 깔고 하늘과 민초를 잇는 영물의 매개로 까마귀를 그렸다. 그 정신이 한민족의 원형적 사유구조로 이어졌고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혼재, 북방문화와 남방문화의 혼류를 통해 거대한 문화유전인자를 키워왔던 흔적이다. 중요한 부분은 바로 울산이 삼족오의 이동경로에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1990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울산 검단리 일대를 뒤졌다. 학술조사팀은 현장에서 환호 1기(基), 환호 안쪽에서 집터 93기, 수혈(竪穴) 3기, 가마터 2기, 고인돌 3기 등의 중요유적과 석촉, 돌칼 등 49점의 석기와 민무늬토기 등 422점의 유물을 찾아냈다. 그리고 좀 더 깊은 연구를 통해 검단리 일대가 BC 4세기 무렵 청동기시대 전기의 중요한 유적으로 확인했다. 중요한 사실은 검단리의 환호유적은 BC 3세기 무렵의 일본 야요이시대 환호보다 1세기가량 앞선 것으로 이제까지 환호가 야요이문화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학설을 뒤집었다. 반대로 우리의  청동기문화가 왜의 야요이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학설이 사실상 증거된 셈이다. 환호는 주위에 호(濠)를 두른 거주형태로 외부의 침입에서 집단주거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어구조다. 중국에서는 화북(華北)의 황토지대, 일본에서는 이다쓰케·아리타·이마가와 환호유적이 알려져 있다.

울산 검단리(檢丹里)가 주목받는 이유는 환호와 가마, 고인돌 등 청동기 유적과 적석총 등 북방계 유적이 동시에 발굴된 지역이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적석총은 고구려 등 북방계 장묘구조인데다 족장이나 왕 등 지배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반달형 돌칼이나 전쟁용과 구별되는 뭉툭한 사냥용 화살촉이 출토된 것은 이일대가 북방과 끈끈하게 닿은 문화적 유전인자를 가진 곳이라는 방증이다. 풀어서 말하면 북방문화의 종착지가 울산에 흔적을 남겼다는 증좌가 검단리 일대에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삼족오로 상징되는 고대 북방문화의 뿌리가 울산에 서려 있다는 증좌다. 

옛 울산 땅은 우시산국이었다. 시(尸)를 이두식으로 풀어 발음하면 우시산은 울뫼로 읽히고 이는 다시 울산이 된다. 우시산국의 도읍지가 지금의 검단 지역일 가능성이 높고 우시산국은 검단분지에 기반을 둔 부족국가로 보는 것이 옳다. 기록에도 나와 있다. 우시산국은 삼국사기 권44, 열전 거도(居道)조에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우시산은 삼한시대 고마족(濊貊族)이 건설한 성읍국가이다. 지금도 이 지역에서는 회야강 둔치 아리소를 기점으로 우시산국 축제를 열고 있다.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와 검단리, 아래로 양산 웅상까지 세력이 뻗었던 옛 울산지역의 작은 나라 우시산은 이렇게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청동기의 찬란한 문화를 일군 우시산국은 기원후 80년에 사로국 탈해 이사금에게 정벌된다. 굴화리 주변의 굴아화촌, 언양읍 주변에는 거지화촌, 서생 주변에는 읍락의 형태인 생서량촌, 그리고 더 남쪽 지금의 부산지역에 있던 거칠산국이 이 무렵 멸망하고 신라의 지배에 들어갔다. 그 지배세력이 바로 울산의 북동쪽 바닷가로 들어온 북방계 철기문화의 후예, 석탈해의 위업이었다. 
 

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북방문화의 뿌리는 어디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이 의문은 연해주와 캄차카 반도로 이어지는 북방 문화루트로 거슬러 간다. 이 일대에 뿌리를 둔 코리약족의 순록 가죽에는 고래 그림이 있다. 울산 반구대암각화와 맥이 닿아 있다. 절묘하게도 이 두 가지 그림은 고래의 생태 습관과 부구를 이용한 고래 사냥 방법에서 상당부분 유사성을 보여준다. 어쩌면 한민족은 바이칼 호수를 떠나 한쪽은 만주와 아리수를 지나 울산만 일대로 모여들었고 또 다른 한 무리는 아무르강 하류를 거쳐 캄차카반도를 지나 알류산열도를 건너갔을지도 모른다. 그 증좌도 있다. 앞서 이야기한 고래그림도 있지만 아무르강 하류에 불과 100여 년 전 19세기 말까지 있었던 온돌의 흔적과 알류산 열도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온돌의 구조가 생생한 고대사의 비밀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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