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홍의 동맥혈, 역사의 지평을 열다
                                                                 
이자영

캄캄이 먼 길 저어온 바다는
해맞이 길에서 한껏 품을 연다
좀처럼 어획되지 않는 세상은
발원도 꼭짓점도 헤아릴 길 없었지만
여명의 땅, 그 어디쯤에선
햇귀 몇 자락이 희망을 귀띔해 주곤 했다
가난한 우리의 삶,
밥이 최고의 에너지원이었던 것처럼
한반도의 밥심이 될 튼튼한 에너지,
그예 역사의 지평을 여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선홍의 동맥혈은 듬직한 송전선을 타고
곳곳의 기운을 돋우며 평화의 불을 지필 것이다
몸져 누웠던 태양이 눈을 뜬다
바다의 창자가 불을 켠다
이제 어둡고 나약한 것들은 죄다 휘발되어 사라져라
마지막 순간까지 실존의 끗발로 타올라라

△이자영: 제34회 개천예술제 문학 당선으로 문단에 나옴. 시집 '궤미' '꽃다발 아니고 다발꽃' '고요한 수평' 외 다수.

올해도 새날은 찾아왔다. 매일 뜨고 지는 해지만 새날 아침에 뜨는 해는 늘 설레고 가슴 벅차다. 바다의 자궁을 열며 핏빛으로 솟아오르는 햇살은 가히 경이롭다.
시인은 한반도의 밥심이 될 첫걸음을 그 에너지원에 실었다. 작은 불씨가 모여 불꽃으로 피워 올릴 때 그 기개는 든든한 동맥혈로 흐를 것이다. 우리는 첫해의 기운을 받으려고 큰 숨을 들이마시기도 하고, 둥그렇게 손을 모아 소원을 빌기도 하고, 모두의 건강을 기원하며 福을 나누기도 한다. 그것이 햇귀 몇 자락의 희망이 아닐까.


선홍의 동맥혈은 마침내 평화의 불을 지핀다. 송전선을 타고 원자력으로 솟구치는 힘은 혼자서 이루어낸 게 아니다. 횃불의 가치를 익히 아는 우리는 단합했을 때의 센 화력을 실감하며 살아왔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세계를 제패했고, IMF 때도 금을 모아 위기를 극복했다. 난관에 부딪힐수록 피붙이가 되어 더욱 뜨겁게 뭉치고, 이웃이 아프면 기꺼이 제 피를 빼주는 민족이지 않는가. 역사의 지평을 여는 선홍의 동맥혈은 숭고함으로 깊게 흐르는 우리 민족의 혈관이 아닐까.

 

이미희 시인
이미희 시인

이 시는 앞부분에 숭고미가 있었다면 마지막 행에는 비장미가 솟구치며 폭죽을 터뜨린다. '마지막 순간까지 실존의 끗발로 타올라라' 끝머리에 남겨둔 파장은 선홍의 동맥혈만큼이나 뜨겁다. '끗발' 우리는 얼마만큼의 기세를 가지고 있고, 또 믿으며 살고 있을까. 올해는 곳곳의 새 기운을 모아 더 단단히 뭉쳤으면 좋겠다. 시에서처럼 어둡고 나약한 것들은 죄다 휘발되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 기세로 각자의 끗발 한패쯤은 손에 꼭 쥐고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 이미희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