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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앗아간 흑사병을 묘사한 그림
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앗아간 흑사병을 묘사한 그림

"절망이 습관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이다" 34살의 까뮈가 괴질의 공포가 짙게 드리운 오랑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낸 문장이다. 페스트.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40년대 프랑스령 알제리 북부 해안의 작은 도시 오랑에 갑작스럽게 흑사병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외부와 격리 조치가 취해지면서 시민들은 고립된다. 그렇게 외부로부터 고립된 채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씩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막장 상황을 까뮈는 담담하게 그려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징적이다. 주인공이자 의사인 리외와 말단 공무원 그랑, 기득권층의 대표주자인 타루, 신문기자 랑베르, 신부, 장사꾼 코타르까지 알 수 없는 공포로 짓눌린 재난 앞에 인간 군상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응한다. 시작은 혼란이었고 과정은 공포와 절망이었다. 

새해 벽두부터 괴질이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우한 폐렴, 공식명칭은 코로나바이러스다. 지난해 12월 초 중국 우한시에서 발병한 이후 두달여만에 전세계로 확산하고 있는 이 신종 괴질은 파급력이 점차 커지는 추세다. 사태 초반만 해도 우한시 내부에 국한될 것으로 판단하는 전문가들이 많았지만 그 판단이 오히려 독이 됐다. 초기 방역에 실패한 괴질은 우한 외 후베이성과 인근 지역, 그리고 중국을 벗어나 해외로까지 퍼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는 양상이다. 우리나라가 우한 폐렴의 영향권에 든 것은 지난달 20일이다. 첫 확진환자는 중국 우한시에 거주하는 중국 국적의 35세 여성으로 국내 입국 하루전에 발병해 발열, 오한, 근육통 등 증상을 가진채 국내에 들어왔다. 그 때부터 질병관리본부는 항공기에 함께 탑승했던 승객과 승무원 등 접촉자를 대상으로 능동감시를 진행했지만 초기 대응 부실로 확진자가 갈수록 늘고 있다. 

재난에 유난히 과민반응을 보이며 박근혜 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해온 문재인 정부는 이번에도 초기부터 범 정부차원의 위기관리 능력을 펼쳐보이려 했다. 질병관리본부가 즉각적인 조치에 들어갔고 우한 거주 교민의 국내송환과 대국민 홍보 등에 나섰다. 능동감시자의 분류 혼선과 교민 귀국 문제의 혼선 등으로 스탭이 꼬였지만 사스와 메르스의 학습효과로 국민들의 자체대응능력이 정부를 뛰어넘는 수준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는 상황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문재인 대통령의 현장 방문이다. 국무회의를 통해 "과도한 불안감, 막연한 공포와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고 이야기 하며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지만 정작 여러 행보에서는 실책이 이어졌다.

언론에서는 정부의 초기대응을 두고 주먹구구식 조치와 정부 인사들의 오락가락하는 발언이 오히려 혼란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이어졌고 결국 보건복지부는 "국민 혼선을 초래한 데 대해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확진 환자가 의료기관을 두 차례 방문했는데도 보건 당국이 아무런 대처를 못한 사실이다. 특히 정부의 1339 질병관리본부 콜센터가 먹통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통령의 발언이 머쓱하게 됐다. 더구나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립중앙의료원을 찾았을 때 의료기관들의 1차 대응 잘못을 질타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마스크를 끼고 장갑으로 무장한채 악수도 하지 않은 것은 부적절한 메시지가 됐다. 대국민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대통령이 맨손으로 악수라고 등을 두들겨주는 스킨십이 필요했다는 지적이다. 탁현민의 공백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청와대에 탁현민이 버티고 있었다면 문 대통령의 의료기관 방문은 훨씬 극적인 연출을 그려냈을 거라는 뒷말이다.

인류사에서 괴질은 언제나 존재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괴질은 역시 흑사병이다. 까뮈의 소설에도 언급됐지만 페스트로 불린 이 괴질은 14세기 유럽을 완전히 장악해 인류사에 가장 치명적인 재앙을 안겨줬다. 흑사병 이야기를 해보자. 소설 속에 페스트로 그려진 흑사병은 1346년에 유럽 동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괴질이다. 이때 창궐한 괴질을 DNA로 추적한 결과 그 병원균이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당시 세계 인구가 대략 4억 5,000만 명에 달했으나 괴질이 지나간 후 15세기에는 3억 5,000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괴질로 인해 최소 1억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셈이다. 흑사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페스트균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기후 지대에 서식하는 쥐 등의 설치류가 주인공이다. 이 설치류에 기생하는 쥐벼룩을 중간 숙주로 하는 박테리아가 괴질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괴질이 발생하기 한해전인 1347년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살아가던 몽골 킵차크 칸국의 군대가 크림 반도에 있는 제노바의 식민도시 페오도시아를 침공했다. 이 전투에서 몽골군은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투석기에 담아 성 안으로 쏘아 보내는 일종의 생물학전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결과, 페오도시아에서는 괴질이 급속도로 번졌고 도시는 시체로 뒤덮였다.

이제는 사라진 괴질 같지만 흑사병은 현대에도 존재한다. 미국의 경우 지난 수십 년간 서부 시골 지역을 중심으로 매년 1건 이상의 흑사병 감염이 보고되고 있다. 비교적 최근인 지난 2006년에는 17명이 감염돼 2명이 사망했고, 2015년에도 16명이 감염돼 4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WHO에 전달돼 있다. 지난해 5월 몽골 서북부 바얀올기 지역에서 마멋의 생고기와 생간을 먹은 남녀가 흑사병으로 사망한 일이 있다. 당시 몽골 정부는 이들과 접촉한 118명에 대해 6일간의 격리와 함께 항생제 투여 등 예방적 조치를 취하는 등 긴급사태를 맞았지만 더 이상의 확진자가 없어 없던 일이 됐다. 이 사실도 WHO에 보고된 내용이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에서도 주목되고 있는 박쥐 이야기를 해보자. 박쥐가 바이러스 원인으로 의심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발병 이전부터 메르스, 에볼라, 사스 등 악명 높은 바이러스가 나타날 때 마다 박쥐는 바이러스 전염 매개체로 지목됐다. 박쥐가 바이러스 매개체로 등장하는 이유는 박쥐 몸 안에 바이러스가 유독 많기 때문이다. 지난 2014년 발병 후 1만 명을 숨지게 한 에볼라 바이러스도 박쥐에서 유래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박쥐가 다른 바이러스 숙주가 될 가능성을 경고해 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박쥐와 같은 바이러스 매개체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다. 많은 감염 전문가들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바이러스 원인으로 인간을 지목한다. 박쥐를 다른 동물에 노출한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이야기다. 야생에서 잘 살던 박쥐들을 잡아 와 다른 동물들이 바글대는 시장에서 그것도 산 채로 피를 흘리게 한 인간이 재앙을 잉태한 주범이라는 이야기다.  

다시 페스트로 돌아가 보자. 페스트가 확산되면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회피하거나 도망가거나 외면하거나 반항하는 모든 이들이 결국엔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괴질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자원보건대를 창설해 페스트와 싸우고 서로의 등을 두드린다. "우리가 페스트 속에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페스트와 싸워야 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외친다. 끝까지 자신과 무관한 도시에서 난데없는 재난을 맞았다며 손사래를 치던 랑베르 역시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어요. 이 사건은 우리들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라는 말로 적극적인 반항에 동참할 것을 선언한다. 
 

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김진영 이사 겸 편집국장

결국 괴질은 사람이 만들어낸 질병이다. 중국이니까.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이 괴질을 만들었다며 손가락질 할 일은 아니다. 이독공독(以毒攻毒)이라는 말이 있다. 독으로 독을 친다는 사자성어다. 악을 누르는 데 다른 악을 사용한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괴질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대처하면 다음에는 더 엄청난 괴질이 인류에게 엄습한다는 경구로 읽힌다. 세상사는 갈수록 앞이 안보인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 근원을 들려다보면 작은 독으로 시작한 부조리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인간의 실책이다. 연일 확산추세에 있는 우한 폐렴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면서 느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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