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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바람이 매섭다. 마른 가루같이 햇살 흩어지고 비닐조각 날리는 12월의 오후는 더 짧아졌다.

우체국 앞 건널목, 바람이 모로 비껴 걷는 나를 밀치고 앞장 서 간다. 바람이 스쳐 간 건널목 끝 붕어빵집 앞에 사람이 몇 보인다. 추운 날의 공식 같은 붕어빵 간판이 잠시 쉬었다 가라, 손 좀 녹이고 가라 내게 손짓하는 것 같다. 먼저 온 사람 몇이 찬바람 속에 발을 동동거리며 붕어빵을 향해 서 있다. 나도 모르게 그 앞에 섰다. 옆에 선 이와 마주 보고 씩 웃는다. 조금은 멋쩍고 조금은 공감되는 추억을 간직한 이들만의 공유할 수 있는 웃음이다.

붕어빵 최고의 맛은 덜커덕, 탁. 소리와 함께 막 틀에서 꺼낸 순간에 있다. 눅어지기 전 바싹한 소리부터 들어야 제격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문병 가려고 주문한 빵일지라도, 막 세상에 나왔을 때 하나쯤 맛봐 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 붕어빵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나는 붕어빵 예찬론자다.

물론 상황에 따라 붕어빵의 맛은 프리즘 색깔만치나 다양할 수 있다. 호주머니 가벼웠던 어린 시절 친구와 나눠 먹던 아쉽고 허기진 맛, 담벼락에 붙어 서서 연인과 알콩달콩 나눠 먹던 달콤한 맛, 식구들과 조금은 눅눅해진 붕어빵을 편안하게 나누는 먹는 맛이 어찌 같은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막 구워진 뜨거운 붕어빵을 호호 베어 무는 순간만큼은 현재가 사라지는 마법의 순간이요, 그 순간이 주는 최고의 맛이니 가히 천의 맛을 가진 붕어빵이라 할 수 있겠다. 천 개의 맛 속에 천 개의 추억과 천 개의 그리움이 숨어 있는 빵이다.  

붕어빵이란 이름 때문에 친구에게 고마움 대신 짜증을 낸 일이 있다. 학창시절. 감기로 며칠 학교에 가질 못했다. 과외수업으로 정신없이 뛰던 친구가 알토란같은 시간을 내어 문병을 왔다. 손에는 거지반 식어가는 붕어빵 한 봉투를 들고 발그레한 얼굴로 좁은 방을 찾아왔다. 쿨룩거리면서도 맛있게 먹는 나를 보더니, '이까짓 풀빵이 무에 맛있다'고 한 마디 던졌다. 순간 나는 먹던 빵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까짓 풀빵이라니? 그녀는 값싼 붕어빵을 사 온 것이 좀 미안하다는 뜻으로 말했겠지만 내게는 무척 서운하게 들린 것이다.

하긴 당시도 붕어빵만치 저렴하고 만만한 음식은 그리 흔치 않았다. 오죽하면 풀빵이라 했을까. 풀칠, 풀떡, 풀빵. 밀가루에 대한 푸대접은 지금에 비하면 많이 심했다. 하지만 내겐 붕어빵은 단순 풀빵이 아니었다. 고향집 아랫목 같은 그런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미안한 기억 하나를 남겨두고 친구와 연락이 끊긴 지 50년이 다 되어 간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나는 길목에 붕어빵을 만나면 어김없이 발그레한 얼굴로 누런 봉투를 내밀던 그녀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십여 분 걸어 내려오면 양철 지붕 점방이 있었고, 그 앞에는 우리들의 로망 국화빵집이 있었다. 빵집이라기보다는 빵틀 하나가 놓여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때 묻은 털목도리를 둘둘 싸맨 할머니가 서투르게 구워내던 국화빵은 언제나 우리의 시선을 잡았다. 

겨울철 하굣길엔 국화빵 틀 옆에 한 번씩 자리를 잡고 섰다 가는 것이 우리 동네 아이들의 통과의례였다. 어쩌다 실수하는 할머니대신 쯧쯧 혀까지 차주며 구경에 몰입했다. 언제나 할머니는 무표정하게 빵틀을 돌리고 그러는 사이 바삭하게 익은 국화가 한 송이 두 송이 노랗게 피어오르던 풍경이 지금도 선하다. 어쩌다 실패한 식고 찌그러진 국화빵을 얻어먹는 날이 있었다. 그걸 한쪽씩 나누어 물고 오래 그 맛을 즐기며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그 맛이 입 안에 맴돈다.

그사이 주문한 내 붕어빵이 완성됐다. 하얗게 제작된 봉투 속에 나눠 먹을 얼굴들을 담고 부지런히 집으로 온다. 머릿속은 여전히 50년 전으로 돌아가 있다. 친구는 아직도 풀빵이라 부르며 살고 있을까? 붕어빵의 온기 같은 그리움이 따스하게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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