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빅풋

                                                                                    석민재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

△석민재 시인: 1975년 경남 하동 출생, 2015년 '시와 사상' 신인상, 201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미희 시인
이미희 시인

아버지의 발자국에선 바람 냄새가 났다. 덜 깬 눈을 비비며 바라보면 아버지는 벌써 대문 밖을 걸어가시고 우리가 잠든 후에야 "사그락 사그락" 바람 소리를 내며 돌아오셨다.


발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모처럼 휴식을 취하는 당신 구두는 군함만큼 우직하고 든든했다. 뒷굽이 삐뚜름히 닳은 구두를 한 손씩 끼고 동생과 나는 하루해가 저문지도 모르고 가지고 놀았다. 우리 가족 신발을 다 태우고도 남을 아버지 구두는 큰 배가 되어 우릴 싣고 미국도 가고, 프랑스도 가고, 때때로 "뿌우" 입 고동 소리를 내며 보고 싶은 사람들도 불러냈다.


가난하지만 어릴 적 오두막집이 더 그립고 추억이 많은 건, 찬 발가락을 비벼대며 살아온 온기 때문이 아닐까.


다 해진 구두 닮은 꺼끌꺼끌한 발로 내 발을 긁으며 장난치던 당신이 몹시 그립다. 가족의 발을 발등에 태워 많은 날을 밟고 다닌 아버지들은 스스로가 바람이 되려고 얼마나 노력했을까. 시인은 말기 암 어머니와 그를 돌보는 아버지를 슬픈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긴 세월을 함께한 부부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스텝을 잘 읽고 잘 밟아준다는 것을 암시한다. 죽음 앞에서도 서로에게 리듬을 맞춰 살아가는 부모님의 부부애가 참 두터워 보인다.


이 시는 사선을 넘나드는 순간을 역설적으로 표현해 백미를 맛보게 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극적인 순간마저 해학으로 푼 시인은 아버지를 꿋꿋하게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빅풋의 기적을 염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절벽 끝에 있어도 아버지는 큰 발로 세상을 부여잡고 어머니를 오두막 그 따뜻한 아랫목으로 데려올 것이다. 바람 냄새나던 내 아버지의 발처럼.
 이미희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