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세월 우리는 민주주의를 향해 싸우고 투쟁하는 과정에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승리한 투쟁과 빛나는 싸움은 기록이 되지만, 많은 사람들은 패배한 기억이나 묵묵히 승리를 뒤에서 조율한 이들에 대한 기억은 쉽게 잊어버린다.


촛불혁명이라는 역사적 물줄기는 기록으로 남을 위대한 투쟁이지만, 시민을 위해 자기 가게의 화장실을 제공한 소수민과 따뜻한 차 한 잔을 주던 이름 모를 시민의 기록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미국에서 양심적 지식인으로 불리는 하워드 진은 자신이 벌여온 반세기 투쟁의 역사를 기록한 자전적 역사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사소한 기억까지 모두 책에 기록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책에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우리에게 "비록 내가 하는 싸움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묵묵히 싸워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에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아니했다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일갈했다.
그의 말씀처럼 누가 봐도 힘센 사람과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 길거리에서 싸우고 있을 때, 그걸 지켜만 보면서 "난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중립을 지켰을 뿐이에요"라고 말하는 건 중립이 아니다.


피해자가 누군가로부터 폭행을 당할 때, 옆에서 그걸 지켜보기만 한 사람들은 중립을 지킨 게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립적인 척을 하지 말고, 분명히 어느 쪽의 편에 들어 행동을 해야 한다.
이것을 '당파성(黨派性)'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당파성의 개념을 하워드 진은 아주 명쾌하게 말하였으니, 이게 바로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개념이다.


기차가 한 방향, 즉 불평등이라는 방향으로 폭주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그 기차를 멈추려 노력을 하고, 누군가는 더 빨리 불평등의 세계로 나아가려 운전을 한다.
이때 달리는 기차 스낵 칸에서 한가로이 맥주를 마시며 "난 아무 것도 안했어요, 중립을 지켰어요"라고 말하는 건 중립이 아니란 말이다.
하워드 진이 활동하던 1960년대는 미국 내 흑백차별이 굉장히 일상적인 때였다.


당시는 백인 전용 식당과 벤치, 도서관, 버스 등이 있는 등 인종 차별이 일상화되는 시기였는데, 이는 일종의 달리는 기차로 볼 수 있다.
가령, 백인이 몸이 지쳐 피곤해 잠시 백인 전용 의자에 앉았더라도, 백인 전용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더라도, 백인 전용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할지라도 하워드 진은 그가 달리는 기차 스낵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과 똑같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재직 중인 대학의 흑인 제자들과 함께 '가만히 앉아 있기 운동'을 펼친다. 이 운동은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벤치에 가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거나, 식당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거나, 도서관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당연히 백인들이 와서 구타를 하고 백인 경찰들이 연행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굴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 운동을 멈추지 않았고, 운동은 점차 더 널리 전파하면서 병원, 극장, 법원 등 미국 전역까지 확산했다.


하고픈 말은 바로 이것이다.
역사를 보면 우리는 미국의 인종차별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노예 해방을 선언한 링컨과 흑인 인권운동의 기수 말콤 엑스나 괴한에게 암살당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기록은 기억을 한다.
그런데 백인 전용 의자와 식당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흑인은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
미국은 결국 인종차별이라는 불평등으로 달리던 기차의 방향을 바꿨다.
달리는 기차 위에 수많은 민중들이 진행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지속됨에 따라 국가적 재난상황으로 온 국민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가히 눈물겹다. 지금은 감염병의 최전선에서 묵묵히 애쓰는 의료진과 방역 종사자 분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의 기억을 되새겨도 모자라는 시간이다.
하지만 현재의 국가 위기를 마치 호재라도 잡은 듯 정치적 입지를 구축할 기회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건 정말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기억이나 관심이 없어도 좋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로 '가만히 앉아 있기 운동'을 앞으로도 계속 시도해 볼 참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