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선에 머물다] 저 못된 것들
[詩선에 머물다] 저 못된 것들
  • 울산신문
  • 2020.03.24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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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못된 것들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이재무 시인: 부여출생. 한남대 국문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석사과정) 수료. 1983년 무크지 '삶의문학' 계간 '문학과사회' 등에 시 발표, 작품 활동. 시집 푸른 고집, 산문집 '생의 변방에서', 저서 '신경림 문학앨범(공저)' '대표시 대표 평론(편저)' 등. 제2회 난고문학상, 제2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아름다운 반란이다. 깜찍한 이탈이다. 자신의 충동을 봄에게 떠넘기며 슬며시 발을 뺀다. 자발적으로 한 짓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뚝 뗀다. 그것이야말로 시인이 가진 유일한 특권이다. 뜸 들이지 않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시의 행을 따라가면 신바람이 나고 웃음이 샌다. 빛과 향이 만발한 봄날에 이런 환상 한 번쯤 해보지 않은 사람 있을까. 시인은 두꺼운 옷과 무거운 명함을 버리고 무언가 저질러보고 싶어 한다. 이렇듯 봄은 중년 남자에게마저 가장 젊은 남성성을 몸 밖으로 끌어내게 만든다. 체면에 걸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버리면 비로소 최초의 봄동이 되나 보다.


봄 햇살이 가슴을 가만두지 않는 날은, 아무 차나 타고 떠나고 싶다. 목적지도 없고 기다릴 사람도 없지만, 누구라도 우연히 만날 것 같은 두근거림이 있다. 여학생의 가방 안에서 옛 소녀들 웃음소리가 들리고 어느 남자의 뒷모습에서 순둥순둥한 첫사랑을 발견하기도 한다. 쑥이 돋는 강변으로 오래전 처녀들이 돌아오고, 꽃향기 짙은 공원 어귀엔 여전히 까치머리 소년이 기다린다. 주고받은 연서가 꽃가지 되어 흔들리는 봄날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상상할 수 있어서 좋다. 발붙인 구역을 잠시 이탈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봄빛 때문인지 꽃향기 때문인지, 다 너그러워지나 보다.
 

이미희 시인
이미희 시인

봄이 완전체가 되어 색색깔 향기를 뿜어내면 놓쳐버린 인연도 그리워진다. 꽃 같은 일들이 꿈길로 찾아와 혼을 뺀 적이 있었다. 애정 행각을 진하게 벌인 뒤 한동안 그 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누가 꿈속을 들여다보지는 않았는지, 바람난 여자라고 욕하지는 않을지, 붉어지는 낯빛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신을 다잡고 세어 보면 어느덧 강산을 몇 구비나 넘었다. 꿈은 저절로 깨졌다. 하지만 꿈꾸는 순간만큼은 가장 아름다운 봄이 아니었을까. 빛나는 햇살을 보며 새로운 꿈을 짓는다. 오늘은 어떤 남자랑 살림 차리는 신을 연출해 볼까. 한 줄기 햇잎이 담장 밖을 기웃거리는 날에는 나도 기어이 문제아가 되려나 보다. 이미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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