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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올 필요 없답니다 민주화가 되었답니다/민주화되었으니 흔들지 말랍니다/민주 정부 되었으니 전화하지 말랍니다/민주화되었으니 개소리하지 말랍니다//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겨울비 온다/어깨에 머리에 찬비 내린다 배가 고파온다/이제 나도 저기 젖은 겨울나무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시 '겨울비' 중에서)


 노동시인 백무산(사진)이 5년 만에 열 번째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도서출판 창비)'을 펴냈다. '한심한 시절'이라는 말에서 보듯 시인은 위선적인 현실 정치와 새 강자들의 언행에 냉소적 감수성을 보인다. 하지만 시인은 허무하거나 퇴폐적인 냉소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시를 통해 이렇듯 피폐해지고 고단한 현실을 잠시 숨 돌리고 가는 '정지의 힘'으로 극복하자고 설득한다.


 시인에 따르면 멈춤의 힘은 아무것도 안 하거나 아무것도 되지 않을 '자유'를 말한다고 한다. 진보 성향 문인이 '자유의 철학'을 강조하는 게 다소 낯설지만, 그는 '멈춤'이야말로 반복되는 폭력적 일상에 저항해 우리가 본래 소유했던 자연적 감각을 되찾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시 '정지의 힘' 중에서)


 시인은 거듭된 혁명을 통해 진보하는 듯 하나 여전히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는 그대로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심지어 힘을 얻은 자들이 약자의 울분을 모방해 오히려 힘없는 자들의 저항 공간인 '광장'을 차지했다고 일갈한다. 
 

 백 시인은 출판사 인터뷰에서 "자기존중이 없는, 스스로를 소외하는 지친 삶이 있을 뿐이다. 현실 정치는 항상 그런 곳에 기생하고 그러한 현실을 재생산 한다"며 "문학인이 그러한 제도권 정당 정치에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위임하고 수동적으로 동원되는 일은 문학정신에도 어긋난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존재로서 구체적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자각을 불러오고 다른 정치, 새로운 정치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문학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강현주기자 uskhj@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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