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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칼금보다 서늘한

                                                                              안성길

4B연필로 무심코 쓰윽 그었던 밑줄
농소3동 도서관 직인에 화들짝
고무지우개 단내 게우도록 떼밀고 보니
휑하니 빈자리 칼금보다 서늘하다
엊그제 3동파출소 앞 건너다
둥실 떠나버린
기름집 그 기다리며
가슴 끝까지 찰랑거리던 양푼의 햇살
오늘은 푸진 불볕 달아 쨍그랑쨍그랑
흔적 없는 주인 들으라고
빈 몸뚱어리 더욱 경쾌하게
요령 흔드는데
이후에
내 자리도 저렇듯
경쾌하고 서늘하기를.

△안성길: 1987년 무크지 '지평'과 '민족과 지역'으로 등단. 시집 '빛나는 고난' '나는 아직도 직선이 아름답다' '민달팽이의 노래' 등. 평론집 '고래詩, 생명의 은유' 등.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영상이 눈에 선하다. 내 기억 속에도 그 서늘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그은 밑줄을 '화들짝' 놀라서 지운 적이 있다. 그 자국은 본래 행간보다 좀 더 깊고 좀 더 색이 허옇다. 그래서 휑하니 서늘한 느낌인 것이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책 속의 말에 공감하는 것으로 같이 분노하거나 같이 펑펑 울 때일 것이다. 빌려 읽는 책에서 누가 그어놓은 밑줄을 보면 그래서 반갑기도 하다. 작가와 나 그리고 그 독자는 물론이고 그가 경험한 가슴시린 순간을 동시에 만나는 즐거움이라 할까. 미처 지우지 못하고 반납했을 책 속에서 그 미지의 독자가 사는 세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고 난 후부터는 밑줄을 황급히 지운 서늘한 흔적까지 책 읽기에 포함될 것 같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부재의 공간이 서늘하고 아린 것은 그 자리에 남은 존재의 흔적 때문이다. 올봄처럼 꽃피는 소리가 반갑고 귀한 적이 있었던가. 한낮 햇살이 뜨거워 겉옷을 벗으며 그 순간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쏟아지는 뜨거운 빛줄기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요즘 캄캄하고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 새삼 배우는 것들도 많다.


'쨍그랑쨍그랑'은 이 시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이다. 시 속 행위와 장면을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소리로 모아 경쾌하게 우주를 흔들어대고 있다. '푸진 불볕 달아'서이고, '빈 몸뚱어리'라서 낼 수 있는 소리가 바로 저 '경쾌하고 서늘'인 것이다. 둥실 떠나간 그를 기다리는 빈집은 얼마나 적막한가. 그러나 '가슴 끝까지 찰랑거리던 양푼의 햇살'은 '서늘'이라는 풍경의 강을 건너서 '경쾌하게 가벼'운 소리에 도달하게 되면서 독자를 유혹한다. 이 지점에 소리와 함께 머물고 싶어지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서 언급한 '이후에 내 자리도 저렇듯'이라는 시인의 큰 욕심(?)에 줄을 서게 되는 것이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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