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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바다

                                                                                류근

옛날 열차를 타고 옛날 바다에 가고 싶다. 응달도 별자리도 없이 옛날만 있는 바다. 사랑도 편지도 문패도 모두 옛날에만 있어서 하나도 아프지 않은 바다. 갈매기와 파도마저 옛날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바다. 옛날의 애인이 울어주는 바다. 가만가만 울음을 들어주는 바다.

옛날 바다에 가고 싶다. 옛날의 모래와 햇볕이 성을 쌓는 바다. 무너져도 다시 쌓으면 그만인 바다. 빨간 우체통이 서 있는 바다. 이별마저 옛날에 다 지나간 바다. 이별마저 옛날에 다 잊히고 잊힌 바다. 이별마저 왔다가 옛날로 가버린 바다.

옛날 열차를 타고 옛날 바다에 가고 싶다. 그 어떤 약속도 옛날이 돼버린 바다. 그래서 이제는 지킬 수 없는 약속만 떠도는 바다. 내가 데리고 간 상처가 가만가만 양말을 벗는 바다. 모든 게 착해진 바다. 다 지나간 바다. 내가 옛날이 되어서 돌아오지 않는 바다. 옛날마저 옛날이 되어서 돌아오지 않는 바다. 돌아오지 않아도 다 용서가 되는 바다.

△류근: 경북 문경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상처적 체질', 산문집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대학 재학 중 쓴 노랫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김광석에 의해 불렸다.
 

박정옥 시인
박정옥 시인

이 시가 왜 가슴을 흔들어 놓는지 모르겠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모두 휩쓸려 나간 텅~빈 폐허에 서 있는 기분. 옛날 열차를 타고 옛날의 바닷가에서 그 옛날의 풍경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그런 곳을 눈물 흘리며 그리워하는 것.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와서 홀로 버려진 기분 같은 거 말이다. 아마도 이것은 단 몇 개월 만에 하찮은 작은 미생물에 의해 모든 지구인들을 흔들어 놓은 사태를 당해서일게다.

그 누구도,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공기가 맑아졌고 부모들은 사실 아이들에 대해서 제대로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됐지만. 낮의 햇볕이 집안의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지를 알게 됐지만.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막막해지는 것들도 경험했지만. 기이하게도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됐지만. 기이하게도 가난한 자, 부자, 힘 있는 자, 모두 공평하게 평등이 이루어졌지만. 무리를 짓지 않고 외따로 닫힌 공간에서 살 수 있다는 것도 경험했지만. 우리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재편성된 사고의 어이없는 새로움으로 바라보게 됐다는 자각일 테지만. 바쁘게 살지 않아도 될 거 같음을 알아 버린 듯 양 볼 강펀치는 아프다. 그래선지 머릿속 풍경들은 모두 흑백으로 가득 차 있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이 시를 보면서 '옛날'이라는 명사에 무엇을 대입해도 좋을 것이며 자신을 통해 빠져나간 옛 것들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서늘함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바다를 통과해 거듭 태어나는 아픔으로 들끓는 것일까. 옛날 열차를 타고 옛날 바다에 옛일이 되어버린 약속. 이제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의 바다. 내가 데리고 간 상처의 바다. 착해진 바다. 지나간 바다. 내가 옛날이 되어버린 바다. 옛날마저 옛날이 되어서 돌아오지 않는 바다. 돌아오지 않아도 다 용서가 되는 이유가 된다. 이토록 멋지고 근사한 바다를 어서 만나고 싶다. 박정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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