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은 도시의 상징이자 자랑이다 - 울산도서관 개관 2주년에 부쳐
도서관은 도시의 상징이자 자랑이다 - 울산도서관 개관 2주년에 부쳐
  • 울산신문
  • 2020.04.2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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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오흥일
울산 초대·2대 교육위원
現 울산시체육회 사무처장

세월이 참 빠르다. 꼭 40년 전(1980년), 내가 군 제대 후 복학을 준비할 때이니 공업도시로 지정된 지 근 20년이 다 되도록 울산엔 시립도서관이 없었다. 당시 경남의 소도시들도 크고 작은 도서관이 있었는데 울산은 인구 40만이 될 때까지 공공도서관 하나 없었다. 복학을 준비하거나 방학 때 하경해 공부하는 대학생들은 거의 다 울산공과대학(현 울산대학교) 도서관(현 예술대학본관)을 찾았다. 이곳이 울산의 유일한 도서관이었다. 그 당시 울산에서 서울로 유학을 간 학생 중에 울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도 많았지만 서울, 부산, 대구 등 외지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학생의 수도 꽤 많았다. 당시 가정형편이 괜찮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초·중학교 때 이미 외지로 유학을 갔기 때문이다. 울산이 "교육의 낙후지"라고 불릴 때였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학생들은 방학 때에도 서울에 남아 공부했지만 어려운 자취생들은 부모의 시름을 덜어주기 위해 대부분 울산으로 내려와서 공대 도서관을 찾았다. 책을 잡을 공간은 이곳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공부하다가 공대의 자교 학생 보호를 위한 학생증 검사에 걸려서 쫓겨나기가 부지기수였다. 쫓겨나서 찾아간 곳이 울산문화원(현 남구문화원) 이었다. 당시 문화원 3층은 열람실로 이용되고 있었다. 옆으로 기찻길이 놓여있어 시간마다 기적을 울려대었지만 갈 곳이 없는 우리들은 감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화원 행사가 있을 때는 또 쫓겨나 사설인 옥교동 유미독서실을 이용해야만 했다.

이처럼 공부를 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느낀 서러움과 울분이 울산시립도서관 건립운동을 펼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서울의 대학생들로 구성된 재경 울산학우회는 울산의 각계각처에 도서관건립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호소하고 다니면서 협조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울산엔 신문사가 없어 조선일보, 부산일보, 경남신문 등에 도서관 건립의 당위성을 기고하고 유관단체도 방문했다. 군복무를 마친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서 본의 아니게 회장을 맡게 되었고 재경 울산학우회는 본격적인 시립도서관 건립운동에 들어갔다. 당시 울산의 국회의원인 이규정, 고원준 의원을 몇 번씩 만나 도움을 청했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도 두 번이나 찾아뵙고 읍소했다. 인구 40만이 넘도록 시립도서관 하나 없는 도시로 전락한 것은 울산시민의 사회적 신념 결핍과 시대적 소명감의 부재, 그리고 울산의 오피니언 리더들의 철저한 무관심 때문이었다. 일부 지역유지들조차 "공업도시 울산에 도서관이 왜 필요하냐"고 반문을 할 정도였다.

철거되기 전 울산중부도서관.
철거되기 전 울산중부도서관.

울산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조바심에 우리들은 1981년 4월 5일 서울 종묘에서 울산 출신 대학생 220명이 모여 울산시립 도서관 건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고 참가자 전원의 서명을 받아 전두환 대통령께 시립도서관 건립 호소문을 올리게 되었다. 청와대로 올린 호소문은 경상남도로 이첩되었고 도에서는 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겠다는 의례적인 답변만 보내왔다. 우리는 굴하지 않고 수차례 대통령께 상소문을 올렸다. 울산에서는 시민들에게 동참을 호소하고, 향토 울산사랑 유인물을 제작해 나눠 주면서 시립도서관건립 시민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로 했다. 이때가 1982년 2월 겨울방학 때였다. 고맙게도 부산 대구 마산 진주 등 다른 도시 대학생들도 적극적인 동참으로 힘을 보태 주었다.

1982년 2월, 시계탑 네거리를 중심으로 유인물을 나누어 주던 대학생 10여 명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도서관 건립운동을 위장해 정권퇴진 운동을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는 것이었다. 연행된 대학생들은 모두 당일 조사 후에 풀려났지만 회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나는 사흘간 문초를 받고 도서관건립 시민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뒤, 부친의 신원보증으로 어렵게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경찰서에 다녀온 후유증으로 건립운동은 잠시 중단하게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몇 후배들이 찾아와 그동안의 노고가 물거품이 될 수 없다면서 다시 시작하자고 독려했다. 여기서 포기하면 "언제 울산에 도서관이 생길지 모른다"고 더 세게 밀어붙이자고 닦달했다. 모두 많이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 생각지도 않은 다른 곳에서 도와주겠다는 기쁜 소식이 왔다. 도서관건립운동에 올인한 우리를 몇 년째 지켜본 후배인 이성헌(전 국회의원)이 1982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회장으로 당선되면서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정말 의외였다. 시국과 관계되는 기관과 총학생회장들과의 미팅에서 학생들의 울산시립도서관 건립운동의 순수성과 당위성을 토로하고 미담사례로 건의해보겠다고 자료를 모두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그동안의 모든 자료를 건네주었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 울산시립도서관 건립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었다. 단지 너무 급하게 일사천리로 추진하다 보니 예산확보에 차질이 생겨 도서관의 크기가 초미니급, 소규모로 건립된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2018년 개관한 울산시립도서관.
2018년 개관한 울산시립도서관.

이런 우여곡절과 끈질긴 노력으로 건립운동 4년만인 1984년 8월, 북정동에 약 9,000만 원의 예산으로 200여 평 남짓한 도서관을 처음으로 얻게 되었다. 이전에 엄대섭 씨의 울산사립무료도서관과 마을문고가 있기는 했지만, 진정한 공공도서관은 처음이었다. 사회봉사단체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예술작품전시회와 시민걷기대회등으로 모금된 기금이 8,000여만 원이 되어, 집기와 장서를 구입할 수 있었다. 36년 전의 일이다. 시립도서관 건립운동 전단을 나누다 북정동 경찰서에 끌려가 문초를 당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평생이 지났고, 그때 같이 고생한 후배들도 이제 다 환갑이 지났으니 세월이 유수 같다. 당시 시립도서관 건립운동에 동참해주신 사회봉사단체 선배들과 종묘에서 서명운동에 참여한 220명의 후배들에게 이 기회에 감사와 안부를 전하고 싶다.

정부에서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도서관과 체육관을 두겠다고 했다. 즉 체감복지로 행복지수를 높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것이다. 어느 도시이건 그 구성원의 민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도서관이다. 미래 동력의 중심이면서 에너지의 저장고라 할 수 있는 500억 원이 넘게 소요된 울산도서관이 개관 2주년을 맞는다. 다소 접근성이 떨어지고 주변 환경이 생태학습관으로 적합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이제는 복합문화 공간인 도서관의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광역시다운 문화 예술공간으로 거듭나고, 시민에게 다가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울산도서관 개관 2주년을 축하하며 지난날 시립도서관건립 운동시절을 회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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