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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살이 부시게 내리고, 벚꽃 몇 잎이 아파트 창 너머 떠오르는 것이 보인다. 나비 같다. 망창을 열고 내려다보니 꽃 위에 꽃은 져서 눈처럼 날리고, 바람결에 꽃잎이 순간 날아오른다. 한참을 내려다보다 돌아서는데 낱말 하나가 가슴 속에 가만히 들어찬다. '속절없다' 올해처럼 이렇게 속절없이 봄이 왔다가는 해도 있구나 싶다. 구태하다고 외면했던 이 낱말이 이리도 적확히 들어맞는 때가 올 줄이야. 

코로나19가 세상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지 몇 달째다. 사회적 거리 두기 동참을 위해 집회 참석은 물론 두세 명 친구 모임도 삼가며 살고 있다. 다투어 피는 꽃구경도 봄나물이 쏟아져 나오는 오일장도 피한다. 어쩌다 먹거리를 사러 나가는 길에 마주치는 사람끼리 좀비를 만난 듯 슬금슬금 외면하고 서로 피해 간다. 잔뜩 긴장하여 지나치고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황폐해지나 싶어 쓴 웃음이 나온다.

무심히 읽었던 T.S. 엘리엇의 '황무지'가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는 '사월은 잔인한 달' 이라 첫 행을 열었다. 1차 대전 후의 상황과 지금 상황이 같을 순 없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종교조차 피난처는 되지 못 하고, 불안과 두려움은 생활 전반에 깔려 우울하다. 자고 일어나면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 수부터 확인하는 생활은 암담하고 어둡다. 종일 듣는 우울한 뉴스와 안내 문자 소리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혹시 내 가족과 친지와 지인의 감염 소식이 올까 두렵고, 작은 일에도 벌컥 화를 냈다 짜증을 냈다 종잡을 수 없다.

불교에 3독이란 것이 있다. 자신을 밝히는데 장애가 되는 세 가지 독,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그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참을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이야기 하다가도 다른 이들이 공감할 수 없는 엉뚱한 부분에서 화를 터트리기 일쑤였고, 그 바람에 사람을 잃었고, 많은 기회를 잃었다. 

나의 생각이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나의 화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과 타협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것도 이후 한참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화 안 내는 법이 아니라 화 덜 내는 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라보기였다. 십 수 년 전 두어 해 정도 요가룰 배운 적이 있었다. 수업 중에 선생님은 늘 '내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바라보세요' ' 지금 일어나는 통증을 바라보세요' '흘러가는 생각을 막지 말고 바라만 보세요' 하였다. 궁금증이 구름처럼 일었으나 바쁜 일정의 선생님은 늘 바람처럼 사라졌다. 무엇이 바라보기인가? 하나의 화두처럼 바라보기를 마음에 품었다. 

그러다 그해 연말에 회원이 달랑 두 명 참석하는 일이 생겼다.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내겐 질문할 절호의 찬스였다. 선생님은 태풍이 부는데 내가 창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은 바라보기요, 창을 열고 나가는 것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리는 것이라 설명했다. 객관의 눈으로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을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바라보기를 배웠고, 바라보기 실천 방법으로 나는 '경우의 수'를 늘이어나가는 방식을 택하였다. 옳으냐 그르냐. 맞느냐 틀리느냐 같은 2분법은 화낼 확률이 50%가 된다. 그러나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는 경우를 하나 더 늘이면 화낼 확률은 30%로 줄어드는 방식이다. 이렇게 경우의 수를 더 늘이면 화낼 확률은 점점 더 줄어들게 마련이라 생각하고 모든 생활에 적용하였다.

코로나19도 처음에는 두려워했지만 점차 냉정한 눈으로 추이를 관망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바라보기를 통해 조금은 덜 불안하고 덜 우울하고 덜 짜증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점점 소멸로 향하는 코로나 19를 대하는 모든 이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이 상황을 이겨나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부디 쉬 정리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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