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이

                                                                       강수완

내가 당신의 무엇이었으면 좋을까
가지런한 간격을 두고 고무신 벗어놓듯
내가 당신의 누구이면 좋을까
조마조마한 간격을 두고 빗물로 내리는

큰 비에 갇혀 표충사 법당에 곤충처럼 앉아서
배롱나무 꽃불이 비에 다비되는 장엄한 광경을 본다
저 연기처럼 속절없이 여름은 가고
활활 타던 사이도 따라가고
삽시간에 개울을 이루는 흙탕 마당에
당신과 내가 나란히 있다

당신은 나의 무엇이었으면 좋았을까
추녀를 만나 한꺼번에 울음이 터지고 마는
당신은 나의 누구가 되었으면 좋았을까
잊을만하면 뭉게뭉게 앞산을 덮어오는

△강수완: 1998년 '자유문학' 등단. 2011년 시집 '꽃, 모여야 산다' 발간. 한국작가회의 회원. 글밭 동인.

잊을만하면 뭉게뭉게 앞산 덮어오는 질문처럼 잊을만하면 이 시가 내게 다녀간다.
태풍이 바다의 속을 뒤집어놓듯 나를 크게 휘젓고 가기도 하고 질문과 나 사이에 잔잔한 바람을 두어 봄밤처럼 아련하게 왔다가기도 한다. 이 시는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으면 좋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무엇이면'이 아니고 '무엇이었으면'이다. 먼저, 지나간 시간을 일으켜 세워 놓고 나서 그 시간과 나란히 앉아서 질문한다. 다음은 '내가 당신의 누구이면 좋을까'라며 다시 현재형을 불러와 그 속에 잠겨있는 당신에게 혹은 나에게 질문한다. 질문의 시작은 잔물결처럼 아름답다. '조마조마한 간격을 두고 빗물로 내리는'에서 보여주는 당신과 나 사이는 더 없이 애틋하고 아름답다. 위태로운 비탈 같았을 시간과 공간을 얼마나 다독다독 눌러 두었는지 알 것 같아 애잔하다.


사이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한 곳에서 다른 곳까지의 공간이고 한 때로부터 다른 때까지의 동안, 즉 시간이다. 시간과 공간이 이 낱말 속에 다 들어있으니 세상천지에 사이 아닌 것이 없는 셈이다. 하긴 인간이란 말자체가 사이를 뜻한다고 하니.
지난 주말에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다. 동그란 봉분 앞에 나란히 적힌 두 분 이름 앞에 술 한 잔 따라 놓고 나니 여전히 한 이불 덮고 계시는 그 사이가 아득한 별빛 같았다. 내 옆에 나란히 엎드려 절을 하고 있는 남편과 나 사이로 연둣빛 바람이 불었다.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연두와 초록 사이로 감잎이 자라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죽은 듯 앙상하던 가지와 가지 사이가 다시 환해지는 계절이다. 이제 연두를 지나 활활 타오를 초록의 세상이 온다.
나는 미리보기로 시인이 제시하는 배롱나무 다비식을 본다. 속절없이 여름이 가고, 활활 타오르던 사이도 가고난 뒤 흙탕마당에 나란히 있는 '당신과 나'를 본다.
시인의 마지막 질문은 "당신은 나의 무엇이었으면 좋았을까"이다. 질문의 중심부에 '나'를 앉혀놓고 사이라는 말의 근원을 다시 캐 보지만 위성처럼 되풀이되는 질문뿐이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김감우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