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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우리나라 대학에는 북한학이라는 이름은 거의 생소한 분야였다. 북한과 관련한 어떤 것도 금기시되던 시절에 북한학이라는 단어는 당연히 생소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부터 이 분야의 학문적 시동은 시작되고 있었다. 북한을 제대로 알고 이를 통해 통일과 대북 정책의 지향점을 제시하려는 움직임은 이상적인 시도였다. 바로 우리나라 유수의 대학들이 학부에서 다루기 힘든 북한관련 공부를 대학원 과정에 개설해 학문적 성취를 찾아간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만해도 북한 관련 정보나 공부는 서울 장충동에 있던 통일연수원이라는 곳에서 주도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이곳은 대학원 과정의 석박사급 교수요원들이나 대학의 학도호국단 간부들을 대상으로 이념교육을 했다. 이곳에 근무했던 교수들이 일부 학교로 나와 1990년대 초반 동국대를 시작으로 북한학이라는 이름의 학부과정이 만들어졌고 한때는 상당히 인기 있는 학과로 자리잡기도 했다.

바로 이 시절부터 생긴 북한관련 학과과 연구기관이 쏟아낸 학문적 성과가 통일론이었다. 1990년대부터 우리 사회에 터져 나온 언론자유화의 바람은 북한관련 금줄도 어느정도 느슨하게 만들었고 이를 이용하려는 정치권은 반공과 통일이라는 상반된 이해관계에 따라 통일의 이론적 근거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통일론자들이 등장했고 급기야 통일론으로 밥 먹고 사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통일은 민족의 미래가 달린 거창한 지향점이라기보다 정치의 방패막이거나 몇몇 북한관련 학자들의 밥벌이 수단이 돼버렸다. 

북한학 이야기로 장황하게 시작했지만 사실은 요 며칠 위안부 문제가 요란한 잡음을 내다보니 떠오른 이야기가 통일론이었다. 지난 주말 50여 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단체들이 더불어시민당 윤미향 당선자의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윤 당선자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권익보호와 일본의 반인륜적 행위를 규탄하는 시민단체 대표로 활동하는 인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 공으로 지난번 총선에 여당의 위성정당에 비례대표로 이름을 올려 이제 곧 금배지를 달 예정이다. 그런 그를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이 지난 주말부터 강력한 세력으로 규합되는 모양새다. 50여 개 단체들은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과 시민당 당사를 항의 방문해 "파렴치한 인간이 원내(院內)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한다"며 "국회의원에서 사퇴시켜줄 것을 요청한다"고 했다. 일제강제동원희생자유가족협동조합 등은 윤 당선자 관련 네 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첫째로 "소수의 위안부를 회유하여 반일(反日)에 역이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지난주 "2015년 한·일 합의 당시 10억 엔이 일본에서 들어오는 걸 (윤) 대표만 알고 있었다"고 했다. 윤 당선자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였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주요 내용에 대한 외교부의 사전 설명을 듣고도 피해자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5년 합의 발표 직후 정대협 대표였던 윤 당선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정부의 상의가) 없었다"며 "피해자들의 의사도 전혀 물어보지도 않았다"고 했었다. 일본이 10억 엔을 낸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지금 주장과 배치된다. 

이와 관련해 당시 협상 과정에 정통한 복수의 소식통은 외교부가 합의 발표 전에 윤 당선자에게 주요 내용을 설명해 줬다고 했다. 피해자 단체들은 또 "윤 씨가 뼛속까지 반미·반일운동의 선봉장으로서 딸자식은 미국 유학 보냈다"고 했다. 윤 당선자의 딸 A 씨는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음대에서 유학 중이다. 윤 당선자 남편 김 모 씨가 과거 '간첩 사건'에 연루된 전력도 재조명됐다. 

딸을 미국 대학에 유학 보내고 남편이 공작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본질과 상관없는 문제다. 도덕적으로야 어찌 입만 열면 반일 반미를 외친 윤 대표가 그럴 수 있냐며 욕지거리 뱉을 수 있겠지만 타고난 재능을 살리려는 자식의 앞길에 어미가 이념적 성향으로 금줄을 치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하지만 본질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자신의 이념적 성취나 개인적 영리에 이용했느냐는 점이다. 북한학을 공부하고 통일론으로 밥을 먹고 사는 자들이 십수 년을 통일의 다양한 방법론과 역학관계로 글을 쓰고 말을 풀어 밥벌이 수단으로 이용한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 문제가 이번 논란의 핵심이다.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이용수 할머니와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전 대표는 30년 동반자 관계였다. 이 할머니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실제 모델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치욕이자 반드시 드러내서 규명해야 할 일제의 강제동원 위안부, 아니 성노예 문제는 이 할머니와 고인이 된 김학순 할머니 두 사람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지난 1991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대한민국 내 거주자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공개 증언했다. 그 이후 1992년부터 정부가 각 지역의 읍·면·동 사무소에 '정신대'라는 정신 빠진 이름으로 피해자 신고센터를 설치해 피해 접수를 받았다. 위안부 문제가 공식화된 역사다. 광복 이후 반세기를 침묵으로 일관하다 피해자의 증언이 피를 토하자 움직이기 시작한 게 대한민국 정부였다. 그 당시 정부는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 바로 우리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들이 나라가 없던 시절, 성노예로 끌려갔다. 너무 오래전 일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겠지만 바로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할머니 이야기다. 부끄러우니 가리고 싶었다. 스스로가 감추고 싶었고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아니 어쩌면 스스로의 남은 삶을 위해 감추어야 했다. 감추지 않으면 손가락질당했고 심지어 우리 사회에서도 "왜놈에게 몸을 팔았다"고 욕을 들었다. 고려 때나 조선조 때 오랑캐에 당했던 선조들처럼 '화냥년'과 단어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상황으로 이 땅에서 숨죽이며 살았던 할머니들이다. 바로 그 성노예 할머니들을 자신들의 출세와 영리를 위해 이용해 먹었다는 게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이다. 

이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가 세상에 위안부 성노예 문제를 처음 알린 것처럼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 그려진대로 미국사회, 아닌 국제사회에 위안부 성노예 문제를 공론화시킨 인물이다. 그 할머니가 "수요집회를 없애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한발 더 나아가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윤미향 전 이사장을 향해 "국회의원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주장은 이렇다. "(수요집회를) 없애야 한다. 성금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른다" "학생들이 공부도 못 하고 나와 있는 건 절대 안 된다. 저는 수요 데모(집회) 마치겠다"고 밝혔다. 

독일은 패전 이후 상당 시간이 흐른 뒤 지난 1953년 연합국과 런던부채협약을 맺고 2차 대전 전쟁 배상을 일괄 타결했다. 하지만 가장 피해가 컸던 폴란드와는 쉽게 배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외면하고 부인하던 독일이 결국 사죄와 배상에 나선 것은 살아 있는 증인들의 피해 실상이 국제사회에 폭로되면서였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피해실상에 독일은 결국 '기억, 책임, 미래재단'을 만들어 폴란드인들을 위로했다. 물론 독일 총리의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는 기본이었다. 고 김학순 할머니나 이용수 할머니 등 국내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들은 이제 20여 분 정도가 생존해 있다. 모두가 90대의 고령이다.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수사를 통하던 여러 방법으로 투명하게 밝히면 될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할머니들이 진실규명과 진심 어린 사죄, 명예회복을 갈망했던 문제가 돈 문제와 비리로 얼룩지고 있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호랑이 한 마리 그려 일본의 이중성을 세상에 까발리겠다는 포부가 개 한 마리 그림이 되진 않았는지 스스로 반성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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