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름답다는 말 만큼 주관적인 것은 없다. 미의 기준은 동서고금, 국가와 민족, 시대와 문화, 철학과 가치관 등 수많은 요소에 따라 모두 다르게 인식된다. 그러나 공감적 상황에서는 서로 마음의 손 내밀어 꼭 쥐고 일치하기도 한다.

손을 내민다는 것은 거리를 지운다는 것이다. 믿고 신뢰한다는 말이다. 한 번 두 번 손 내미는 것이 쌓이면 관계는 돌보다 강철 금강석보다 더 단단해진다. 그러나 서로 거리를 유지하는 건 긴장의 피곤한 연속일 뿐이다. 심지어 아예 더 벌리고 점점 멀어지는 건 무심해져 안중에도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거리를 지우면 서로 다정하게 되고 점점 따뜻하게 되고 마침내는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고 사랑하여 참으로 사랑이 깊어지면 몰아(沒我)가 일어난다. 몰아는 다시 희생과 헌신에 아무 스스럼없다. 성스러움의 향기조차 감도는 것이다.

최근 필자는 인터넷을 열다가 이렇듯 아무런 스스럼없이 내민 손을 보았다. 그 앞을 한참이나 서성거리며 가슴이 온통 뻐근해지도록 아프고 기쁘고 고맙고 감사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먹먹함에 눈물이 나고 말았다. 하루 종일 허옇게 소금 땀과 소독약에 찌든 손바닥피부가 다 들고 일어나 말끔한 곳이라곤 없었다. 그것은 코로나19 방역에 눈 코 뜰 새도 없는 우리 의료진의 손 중 하나였다. 기사는 "마치 허물을 벗는 파충류를 연상시킨다"고 썼다.

그 손은 너무도 희고 고요했고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내 건조한 타클라마칸 사막 같은 심장 깊고 어두운 콘크리트 밑바닥 저 끝까지 온통 뒤집어지도록 커다랗게 사자후를 토하고 있었다. 놀라 자빠질 노릇이었다. 단지 나는 그 손을 지켜보기만 했을 뿐인데, 일면식도 없고 매사에 이기적이기만 했던 나를 이토록 뜨겁게 사랑한다고 귀청이 터져나가도록 소리치고 있음을 순식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어느 TV프로그램에서 본 실험이 문득 떠오른다. 갓 지은 밥을 두 개의 락앤락 통에 담고 각각 "사랑해!"와 "짜증나!"를 뚜껑에 적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날마다 해당되는 말을 밥에다 하게 했다. 몇 주가 지나 열어보니 "짜증나!" 통의 밥은 상해서 곰팡이가 피고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사랑해!" 통의 밥은 놀랍게도 구수한 누룩냄새가 솔솔 났다. 이를 보고 어린 저학년 자녀들과 함께 실천한 어느 학부모의 후기 또한 놀라웠다. 실험의 결과를 같이 경험한 그날 이후 아이들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우선 아이들의 입에서 나쁜 말이 사라졌고 학교의 과제도 스스로 챙기더라는 것이다. 

얼마 전 너무도 헌신적인 우리 의료진과 자원봉사자, 질병관리본부와 전국의 지자체, 중앙 정부 그리고 대다수 시민들의 노력이 합쳐져 드디어 힘들었던 사회적 거리두기를 넘어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코로나19의 방역을 조심스레 전환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수백 명의 시민이 불행히도 희생되었고, 생업이 풍비박산된 속에 아직도 망연자실한 취약계층 또한 헤아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생활 방역은 캄캄 어둠 속 한 줄기 빛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외가닥 구명줄이었는데, 이 모든 것을 이태원 클럽 관련 젊음들의 코로나 확진 쓰나미 한 방이 죄 쓸어 버렸다. 너무도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 결과 전 국민적 손가락질이 그들을 향해 폭발하고 말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사회 각계각층의 차가운 시선,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폭언 공습이 무차별 자행되고 있다. 그들 다수는 마스크조차 쓰지 않고 마구 활보했다니 변명의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사실 지금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국가 간에서조차 "마스크는 생명"이라며 쟁탈전이 치열할 만큼 중요한데, 그들 사이에서 '2030은 무증상이 많고 걸려도 안 죽는다'는 말이 만연해 있다는 데는 아연실색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래서 많이 괘씸하고 더 많이 미워 더 들어볼 것도 없다며 그들 앞에서 귀 막고 무섭고 맹렬한 폭력 폭언으로만 대한다면 그것은 결코 지금의 사태를 제대로 해결하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불난 데 기름을 끼얹는 일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당황스럽고 움츠러들 대로 움츠러들어 최대한 숨으려는 처지들이다. 그들이 이 험악한 손가락질 분위기에 더욱 꼭꼭 숨어버리면 그들도 그들이지만 전염에 취약한 이들의 희생은 더욱 가중될 공산이 더 크다.

그래서 필자는 이태원 클럽 사태를 넘어 우리 젊음들에게 기성세대가 먼저 손 내밀어 전대미문의 일자리경쟁에 내몰린 그들의 등부터 쓸어주고, 지금이라도 폭언의 난사 이전에 코로나 방역에 허물 벗는 파충류 된 저 손 말없이 보여만 줘도 이 국면은 전환될 거라 믿는다.    

"인간에게는/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아/용도 폐기된 근육이 하나 있으니/ 귀를 움직였다는 놀라운 흔적<…>그리고/또 하나,/이 세상에는/진화론으로도/용불용설로도/ 설명할 수 없는/흔적기관/'사랑'이란 게/있었다고 한다"(권영해, <흔적기관>, 전문)

지구별에 올 땐 모두에게 생득적이었지만, 극도의 이기에 포로 된 지금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래서 마침내 '흔적기관'이 된 '사랑', 이것은 진정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것임에도 시인은 굳이 "있었다고 한다"고 부정한다. 즉 각자의 이기에 매몰되어 삶 본연의 바탕인 '사랑'의 부재, 알맹이를 상실한 현실을 무심한 듯 통렬하게 꼬집어 그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사랑'이 부재한 모든 곳에 의료진의 저 아름답게 쭈글쭈글 허연 손이 정답인 듯하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