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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서재에 앉아 날짜와 요일, 그리고 날씨를 습관처럼 쓰고, 오늘의 흔적으로 하루치의 삶을 요약해 정리한다.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횡대를 이룬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 생각이란 놈의 자세가 제멋대로인 것을 알겠다. 매우 주관적이어서 친밀감만은 끝판 왕이다.   

못난 모습, 안타까운 모습, 슬픈 모습, 간절한 모습을 품은 지층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가끔은 여유롭고, 괜찮은 모습도 끼어 있다. 모두 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이 이제야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리 관대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참 고전적인 일기문인 셈인데, 결미문장은 늘 반성문 꼴의 글이다. 내 삶이 세상의 준거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리송한 잣대로 이리저리 들이대면서 나를 속박하기만 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만만했던 것일까.

못난이가 될 때도 있지만 괜찮을 때도 있지 않은가.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친지 댁에서 오랜 세월 집안일을 도와주던 분이 남편에게 가끔 털어 놓았다던 말이 생각난다. "ㅇㅇ이란 놈은 내가 잘못한 것만 기억했다가 야단이야" 그 분은 젊을 때부터 환갑이 될 때까지 친지 댁의 마름으로 있었기 때문에 주인이라 해도 자식 또래다. 해서 남편에게 그놈은 어떻게 내가 잘못한 것만 기억하는지 모를 일이라며 은근히 뒷담화를 하더란다. 사람은 대개 타인이 잘한 일보다 그렇지 못했던 일을 잘 기억한다는 말이다. 

나는 타인이 아닌 나에게 그렇다. 훌륭하지는 않아도 괜찮을 때도 있었을 텐데 늘 반성문 같은 일기를 쓰고 있다. 내 모자라는 점을 알려면 일기장을 펼치면 정말이지 백과사전이 따로 없다. 어느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참, 나는 나쁘다' 그런데 막상 괜찮은 점을 쓰려고 하니 딱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결국 나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나의 자질을 넘어서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조심하고 반성하면서 용케도 수십 년을 살다보니 어느새 나이 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많은 날들을 반성하고 점검해도 다가오는 시간 속에 놓일 내 모습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작년 11월 4일에 평지에서 발을 옮길 때 순간 내 몸은 균형을 잃고 속절없이 넘어졌다. 지금까지 기록된 나의 인생 백과사전에도 없는 실수다. 그토록 지난 시간에 대한 일상의 조각들을 모아 들여다보고, 정리하며 반성까지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살았지만 막상 넘어질 때는 어떤 비책도 떠오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써 볼 겨를조차 없었다. 본인도 예측할 수 없는 생의 여정이 담긴 인생백과사전은 그래서 늘 과거형만 모여 사는 별이었던 게다. 

그러니 낭패를 보는 순간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아Q'가 되어 정신승리법 같은 헛소리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민망한 어조로 "아직 순발력이 살아 있네"라며 내가 처한 상황을 살필 겨를도 없이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그때 오른손 새끼손가락에서 전해오는 묘한 느낌과 함께 머릿밑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뿔싸, 손가락은 이미 부러져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 있지 않은가. 통증이 시작될 때쯤 남편이 왔다. 움켜잡고 있는 손을 보고는 조심성 없다고 한마디 한다. 그 상황에서도 별것 아니라며 점심을 준비했다.

새끼손가락은 완전히 골절되어 결국 수술까지 받았다. 나에게 뜻하지 않게 일어났던 두어 시간 동안의 일과 그 상황에 대처한 나의 모습을 다시 정리를 하자니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입에서 "등∼신"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날도 이런 나의 흑역사는 '얄짤없이' 인생백과사전에 올랐다. 이처럼 일상이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기록한 사람이 다시 펼칠 때는 늘 최고의 베스트셀러다.

그 까닭은 일기는 부유물 같은 일상이 아니라 자랑스럽지 않더라도 내 의식에 침전된 삶의 참모습을 담고 있는 금강석이기 때문이다. 인생백과사전의 갈피를 넘길 때마다 일어나는 회한과 감동은 살아가는 동력이 된다. 하루의 일과는 세상사라는 오만 가지의 양념으로 빚었지만 이 음식은 오직 한 사람만 만들 수 있는 요리기에 그 맛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다. 대중적인 맛과 거리가 멀수록 요리사는 고독하고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 무게마저 존재의 의미를 깊게 한다.

인생백과사전의 낱장을 넘길 때면 상투적인 형식의 하나인 날짜와 날씨 기록마저 그 맛이 각별하다. 그것은 아랫단부터 펼쳐지는 나의 서사가 규범 속에 훈련된 체면마저 간단히 뛰어넘는 용감한 진실의 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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