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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지금 사는 우리 동네로 이사 오게 된 결정적 이유는 지번 때문이었다. 도심 속에 살면서 꿈꾸어 온 약간의 은둔과 낭만이 깃든 듯한 '산 26번지', 주소를 아는 순간 '이곳이다' 생각되었다. 나는 이 주소가 좋아 도로명주소로 바뀌고 나서도 한참동안 이 지번을 사용했다. 

내비게이션이 있어도 우리 집을 찾아오기란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대로를 달리다 동네 입구로 들어서면 갈레길이 여럿 있는데, 두어 번 왔던 사람들도 헤매기 일쑤다. 그래서 주차를 엉뚱한 곳에 해놓고는 남의 아파트 단지와 구분 짓는 담벼락 밑에 난 개구멍으로 나를 마중 나오게 하는 일이 많다.  

내비게이션이 차를 뱅뱅 돌게 만드는 이 동네에서 기준은 '모드니'마트다. 모드니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난 세 갈래 길 중 가운뎃길을 타고 올라오라고 당부를 한다. 분명히 그렇게 말을 했건만 사람들은 어김없이 모드니 앞 널따란 삼각지대를 헤매며 차를 돌려댄다. 그나마 다행인 게 모드니 마트 앞마당이 넓어 차를 돌리기가 힘들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를 찾아오는 사람치곤 모드니 마트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들어가서 물건을 사지는 않아도 대개 모드니 앞에서 약속 시간을 기다리거나 대로에서 만난 이웃 사람들이 헤어지기도 한다. 동네 가운데 마트가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갑자기 떨어진 조미료를 사러 슬리퍼를 끌고 갔다 올 수 있으며, 집밥이 똑딱 떨어져도, 한밤중에 입이 궁금해도 환히 불을 켜놓고 기다리는 마트가 있으니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동네 마트는 이 정도 소용밖에 없던가. 시간만 주어지면 무조건 차를 몰로 대형마트까지 나가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나간 김에 이것저것을 사고, 세일이 겹치면 바리바리 물건을 사서 모드니 앞을 쌩하니 지나친다. 그러니 동네 마트란 일찍 문을 열어 늦게까지 버텨야만 유지가 되는 듯하다. 손님들이 오다가다 잊은 물건을 살 때 내놓는 티끌로 태산을 만들어가야 하는 꿈을 꾸는 가게다. 

한번은 지갑을 잊은 채 모드니에 들렀다가 외상을 달아놓고 왔다. 장부에 주인이 적는 우리 집 주소와 전화번호 손글씨가 정다웠다. 얼른 돈을 갖다 드리겠다는 말에 생각나면 갖다 달라는 대답이 달달했다. 딸과 함께 들를 때마다 주인아저씨는 우리를 빤히 번갈아보며 붕어빵 모녀라고 놀려댔다. 그러면 우린 마트 아저씨 정말 이상하다며 씩씩대곤 했다. 주로 오전엔 아저씨가, 오후엔 배달 다니는 아저씨 대신 아주머니가 야채를 다듬으며, 늦은 밤이면 가끔 아들 총각이 카운트를 본다. 식구들이 돌아가며 마트에 매달려있는 형국이다. 가뭄에 콩 나듯 들를 때마다 자주 애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한마디로 동네 소형마트는 평소 안중에도 없다가 딱 필요할 때만 찾는 곳으로 일부러 마음을 내어 들르기란 쉽지가 않았다. 

주민들의 생활에 응급용 공급처 같이 자리를 지켜오던 우리 동네 모드니 마트에 플래카드가 걸렸다. <그동안 성원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부득이 폐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오신 "포인트" 사용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용기간: ㅇ월 ㅇㅇ일~ㅇ월 ㅇㅇ일까지> 나는 이른 아침 차를 몰고 모드니 앞을 지나다가 마트 마당을 몇 번이나 돌았다. 모드니가 사라지다니, 긴요할 때마다 기대어오던 어깨 하나가 맥없이 넘어가는 듯했다. 이제 정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장소가 아니라, 있을 땐 모르지만 없으면 안 되는 무엇, 마치 옷의 제일 윗단추나 혹은 가장 아랫단추 하나가 달아난 느낌이었다. 춥거나 더울 때 여미거나 풀 수 있는 단추가 떨어진 듯했다. 이 떨어진 단추 대신 어떤 세련되고 편리한 단추가 달려질지, 아니면 없는 대로 살아가며 우리 동네 사람들은 이제 더더욱 대형마트를 이용하거나 온라인 장보기에 길들여갈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에는 오래 오래된 이 작은 마트 하나가 동네 복판에 버텨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소상공인들이 줄도산하는 즈음, 우리 동네 '모드니'도 예외가 아니었나보다. 백 세 시대, 인생은 칠십부터라는 시쳇말이 있다. 아직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인 모드니 주인 내외와 모드니를 잃은 우리 동네 사람들도 21세기 4차 혁명시대를 향해 걸음마를 떼야하는가 보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아이쇼핑만 해오던 것을 이제는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고 개인정보란에 동의를 한 주소로 배달요청을 하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된다. 장을 보며 물건을 들었다 놨다 하거나 흥정을 하거나 덤을 얹거나 하는 쇼핑의 재미는 사라지고, 인공지능 시스템을 의지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재미를 붙여야하겠지. 떨어져나간 단추 따윌랑 잊어버리고 이 시대가 디밀어주는 것에 우리를 꿰어 맞추며 사는 것이 살아내는 방법이겠다 싶다. 

마침 이번에 코로나19로 인해 들어온 국민재난지원금이 있으니 '모드니'가 문을 닫기 전에 조문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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